저시력 149

목단

비가 그치고 아파트 산책로를 따라 돌다가 작은 햇살 사이로 피어난 모란꽃을 집사람이 찍습니다. 너무 너무 예쁘다는데 실명하기 전 도회지에서만 자라다보니 이런 좋은 꽃을 미처 보지 못한게 아쉽기만 합니다. 문득 집사람이 목단이라고도 부른다는 말에 어디서 들었지 생각해보다 어릴적 할머니와 담요를  펼쳐놓고 치던 민화토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유치한 색감의 화투판에서 보던 목단이 이 모란을 의미한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그 그림보다 훨씬 예쁘고 아름답다고 합니다. 기상이변에 살기 어려운 요즘이지만 어쩌면 우리 인간들보다 이 자연만큼 한결같이 제 몫을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녀석들도 없습니다.

일상 스케치 2024.05.06

헬렌켈러의드레스

올해도 어김없이 장애인의 날이 저물어 갑니다. 예전에 비해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장애인들은 일년 중 딱 하루만 기억되는 이런 세상에 힘들어 하곤 합니다. 요즘같은 날이면 신문 기사나 유명 정치인들의 덕담 속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인물 중 하나가 헬렌켈러입니다. 어릴 적 위인전에서 익숙해진 그녀와 그녀를 교육한 설리번의 일화와 삽화는 지금도 유년시절의 기억속에서 생생하기만 합니다. 특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가운데서도 세상 사람들에게 향한 그녀의 멋진 조언은 언제나 감동 그 자체로 우리에게 울림을 주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과연 헬렌켈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헬렌켈러가 재활을 위해 흘린 땀방울과 보고 듣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했던 말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단상 2024.04.20

내가 준비하는 '소풍'을 설렘으로 만들고 싶다면

직장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생각과 다르게 하루를 마무리하게 되는데요. 별 것 아닌 일임에도 누구의 무게가 더 무겁고 누구의 일이 더 큰지를 가르는 소모적 논쟁으로 온통 하루가 저뭅니다. 그러다 허탈한 마음으로 문을 나설 때면 답도 모른 채 오늘 내가 무엇을 한 것일까, 이게 대체 내게 어떤 값어치가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얼마 전부터 '소풍'이라는 영화에 대한 리뷰와 몇몇 인터뷰를 접하며 왜 사람들이 저리도 일개 영화를 입에 오르내리는지 궁금해 했었습니다. 특히 나문희 배우의 애정어린 영화평을 대하며 소위 메이저 또는 화려한 cg와 헐리우드 영화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소자본, 그것도 노년기에 접어든 세명의 이들이 주연인 영화의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황금같은 선거일..

군자란과세월

요 몇년 봄꽃들이 기상이변으로 한꺼번에 모두 피어 버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봄의 소소한 즐거움을 놓쳐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이미 피어서 지기 시작하고도 남을 벚꽃들이 몽우리만 겨우 맺은 채 요지부동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베란다에서 30년 넘게 한결같이 봄을 알리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결혼하면서 서울 부모님댁에서 넘겨받은 군자란이 바로 그 녀석들인데요. 최소 30년이 넘은게 분명한데 부모님으로부터 받을 때도 풍성한 녀석들이었던 걸 보면 도통 나이를 모르겠습니다. 예네들은 도대체 세월을 먹기는 하는 걸까요.

끄적끄적 2024.03.31

GPT와 작은 두려움

조금 전 American Printing House for the blind 페북 글에 연결된 링크를 타고 들어갔더니 새로운 전자점자기가 출시되어 보급 중인 것 같습니다. 보조공학과 전자점자기는 평소 관심사이기도 하여 내용을 살펴 보았습니다. 자세한 내용과 사진은 아래 링크로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될 것 같고 저는 관련하여 최근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번역 수준에 대해 잠시 이야기할까 합니다. 평소 보통의 긴 영어 원문 중 정확한 해석이 필요할 경우 일단은 아이폰앱으로 깔려진 우리가 잘 아는 몇 가지 번역 앱의 힘을 빌리는데요. 이전보다는 좋아졌지만 제가 보기엔 여전히 맥락에 맞지 않은 단어와 구어체와 학술적 문구가 뒤섞여 대략의 분위기만 알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chat gpt로 해석해 달라고 하고 ..

사람보다낫다

예전에는 동백이란 남도의 섬이나 따스한 곳에서만 구경하는 꽃인줄 알았습니다. 몇 년전 집사람이 동백 화분을 사왔다고하기에 집에서도 동백꽃을 구경할 수 있다는 건지 낯설기만 하더군요. 역시나 나름 베란다 화분 키우기의 달인이 된 집사람에게도 동백을 구경하기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습니다. 4년이 되도록 아무리 자식보다 더 살갑게 다루어도 동백은 우리에게 냉정할 정도로 잎만 보여줄 뿐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집안 청소를 하다가 고개를 돌린 아내가 베란다로 달려갑니다. 전혀 보지 못하던 빨간 꽃들이 창밖을 메우고 있다나요. 마침내 그 고고한 동백이란 녀석들이 꽃망울을 터트렸더군요. 아무리 애지중지 챙겨도 답을 않던 녀석들이 오히려 혹독하게 꽃샘바람과 늦추위에 내버려두니 스스로 못견디고 꽃을 보여줍니다...

일상 스케치 2024.03.02

만드는 게 중요한게 아니라 정확하게 만드는게 중요한거야

행복하고 여유로운 설 명절 보내셨는지요. 코로나19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명절에 만나기 시작한 형제들끼리의 즐거운 수다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명절 때 우연히 마주친 생활 속 점자에 대해 간단히 적어 보려 합니다. 1) 의정부에 자리한 저희 부모님 아파트가 그동안 낡고 좁은 엘리베이터 대신 최신형의 엘리베이터로 교체를 했더군요. 친절한 음성안내에 내부도 넓어진 엘리베이터는 역시 편리했습니다. 그런데 손끝으로 층별 배치에 만들어진 점자를 대하면서 뭔지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음 날 다시 각 층마다 있는 상, 하 버튼을 자세히 보니 규격보다 간격이 넓직하고 알도 조금 커보입니다. 2) 몇 년전 부모님 화장실에 사용되던 비데가 고장났다 하여 인터넷 주문으로 새로 비데를 주..

럼주

어느 날 아내가 시키지도 않은 럼주를 사왔다며 한 잔 따라 줍니다. 여러 해전 유럽여행을 갔을 때 한 병 사온 것 말고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예천 럼주가 인터넷에서 민속주로 판매가 되고 있다네요. 술도 못먹는 사람이 어쩐 일이냐 했더니 알고 본즉 요즘 자신이 만들고 있는 빵에 럼주를 넣어야 맛이 난다해서 굳이 이 비싼(?) 술을 샀다고 실토합니다. 사람도 없어서 못먹는 이 귀한 술을 일개 빵에다가 부어 버린다니 진짜로 어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특별히 예술성을 가미해서 빵을 완성했다며 갖고 와 만져보게 합니다. 이리저리 꼬인 게 제법 예술작품 같습니다. 여기에 그 귀한 럼주가 들었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고 그러네요~~~ 맛은 뭐 보시는 대로 먹을만 하긴 하..

일상 스케치 2024.02.04

걷기

그나마 걷기가 신통치 않은 시각장애인 교사에게 방학은 몇 안되는 걸음수조차 확보하기 힘든 시기입니다. 러닝머신이나 집앞 산책 등 이런 저런 대안을 찾아보지만 날씨 탓, 업무 탓 등등 핑계만 늘어갑니다. 그러다가 결국 핑계의 핵심은 대안 기기에 집중되더니 어느 사이 집안에 에어 클라이머라는 기기가 생겼습니다. 기존 스테퍼보다 덜 어렵고 걷는 재미도 있어 요즘 한창 이용하고 있는데요. 토스앱의 만보기로 몇 원씩 돈도 챙겨가며 걸음수를 확인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걷기 시작하면서 토스앱 만보기 화면에 나온 다음의 문구가 사람을 참 당황하게 만듭니다. "굴러서 냉장고까지 갈 수 있는 타입"

일상 스케치 2024.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