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설날
듣기만 해도 정겨운 민족의 대명절 설을 맞았다. 올해도 자신의 고향과 웃어른을 찾아 손에는 바리 바리 선물을 들고 찾아 떠나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주차장을 방불케하는 차량들로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은 어릴 적 뛰어놀던 고향의 뒷동산에 먼저 달려가 있는 때가 바로 설 명절이다.
집집마다 새하얗게 눈이 덮힌 지붕과 마당. 그속에서 방금 뽑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 한 가락을 손에 쥐고 아랫목에 앉아 간장종지에 찍어 먹던 그 시절을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서울 토박이로 태어나 6, 70년대 유년시절을 변두리의 회색담과 뿌연 도회지의 하늘을 바라보며 지낸 필자는 시골을 고향으로 둔 친구들이 언제나 부러웠다.
그러한 부러움 중에서도 명절 때 찾아가 뛰어놀 시골 친척이 없다는 사실은 어린 나이에도 내겐 불만의 대상이 되곤 했다.
맏아들로서 칠순이 넘은 어머님을 모시고 계셨던 아버지 덕분에 우리집에는 설과 추석 때면 언제나 친척과 손님들로 붐비곤 했다.
할머니께서는 우리 식구들 중에서도 누구보다 명절을 기다리신 분이셨는데 그것은 오래간만에 손주들에게 당신이 원하는 것을 실컷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명절 때마다 특별 대우를 받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어린 나이의 필자였다.
그 시대의 분들이 그렇듯 나의 할머니께서는 맏아들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남다르셨는데 그러한 애정은 연이어 집안의 맏손주로 태어난 내게도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특히 설 때가 다가올 무렵이면 할머니께서는 정성스럽게 부친개와 각종 전, 그리고 가래떡과 만두를 준비하셨는데 그 중에서도 제일 맛나고 정성을 쏟아방금 빚어낸 것을 꼭 내게 먼저 접시에 소복히 담아 주시곤 했다.
2남 2녀였던 나머지 형제들이 먼저 먹고 싶어도 그것만은 집안의 어른이신 할머님의 절대 명령으로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다.
설날이 되어 세배를 할 때에도 집안의 장남인 내 복주머니는 이러한 할머니의 특혜(?) 덕택에 누이를 포함한 다른 형제들보다 월등히 많은 세뱃돈으로 두둑하곤 했는데, 혹시라도 친척분들이 나를 다른 형제와 동일한 세뱃돈을 줄 때면 즉시 집안의 어른인 할머니의 질책이 날아왔고 이러한 원칙은 즉시 반영되었다.
그 옛날 어렵고 못살았던 시절을 겪었던 할머니께서는 누구보다 자식들에게 배불리 먹이고 싶어 하셨는데, 늘 지나칠 정도로 많은 양의 차례 음식을 준비하시고 돌아가는 자손들에게 한 보따리씩 꼭 쥐어주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당신의 사랑법 덕분에 필자는 명절 때마다 자주 탈이 나곤 했다.
할머니는 어릴 적 철없는 내가 조르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사주셨는데 다른 형제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치마폭에 숨겨둔 것을 내 앞에서 꺼내 먹여주시곤 하셨다.
'우리 장손, 많이 많이 먹어야지~.'
당신이 가져다 준 음식을 맛나게 먹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은 그렇게 흐뭇함으로 가득했었다.
어릴 적 설명절 동안 필자는 그렇게 할머니의 사랑 속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하게만 커온 손주가 15살 때 실명하게 되었을 때 할머니께서 받은 충격은 실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자식의 장애를 대하는 부모님의 고통과는 또다른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맏손주의 장애를 인정할 수 없었던 할머니께서는 한동안 기력을 잃으셨고 그 후에는 주의 사람들의 말과 민간 무속신앙에 의지하며 필자의 눈을 뜨게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셨다.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손주의 장애는 되돌릴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대가없는 사랑은 앞을 보지 못하는 손주에게 더욱 더 애틋하게 다가왔는데, 지방 맹학교에서 생활했던 필자를 위해 팔순에 가까운 고령에도 불구하고 손주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 가득 들고 내려와 일일이 먹여주시곤 했다.
그러나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할머니의 한결같은 사랑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필자는 뜻없는 짜증을 부리기도 했고 그 때마다 돌아서서 눈시울을 흠쳐내시던 할머니의 모습을 어린 손주는 알지 못했었다.
세월이 흘러 다행히 대학에 진학하고 여자친구를 사귀고 직장과 결혼이라는 관문을 하나씩 통과할 때마다 당신께서는 그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특히 결혼한 우리 부부가 사내아이를 낳았을 때의 당신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미 구순이 되어버린 노쇠한 몸이셨지만 강보에 싸인 증손주를 안고 눈물을 를리시던 당신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노안으로 시력이 흐려지고 구부러진 허리로 겨우 지탱하시던 몸이셨지만 손주와 증손주를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은 세월의 흐름속에서도 하나도 변함이 없었다.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증손자를 안아보신 지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할머니께서는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다. 그 날은 마침 설 명절까지 채 1주일도 안남은 시기로 모든 사람들이 명절 준비에 분주한 때였다.
맞벌이 생활 10년에 어느새 집에 들어서면 설거지에 청소기 돌리고 밤마다 아이들 씻기느라 진땀을 흘리는 것이 남편으로서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나에게 가끔씩 아내가 묻곤 한다.
'당신은 지금도 어릴 적 할머님으로부터 누리던 생활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글쎄...'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머리를 긁적이곤 한다. 불합리한 것을 알면서도 그러한 문제점에 대한 시정을 외면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나이지만 할머님이 생전에 베풀어주신 지극한 살앙에는 오늘날과 같이 이해관계가 첨예한 현실의 아귀다툼과는 다른 순수한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전 엄마와 함께 아파트 상가의 떡집에 들렀던 딸아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빠에게 떡 하나를 내밀었다.
'아빠, 이거 먹어봤어?'
만져보니 이제 막 기계에서 뽑혀나온 듯한 따끈따끈한 가래떡 한 가락이었다.
요즘 아이답지 않게 떡을 좋아하던 딸아이는 가느다란 떡복끼떡만 보아오다가 이렇게 직접 굵직한 가래떡을 파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아빠도 가래떡 진짜 좋아해.'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딸아이와 함께 가래떡을 먹으면서 필자는 오래전 할머니가 쥐어주시던 그 날의 김이 피어나던 따스한 가래떡,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사랑을 새삼 생각했다.
* 2004년 1월 한맹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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