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어느새 결혼이라는 생의 큰 관문 하나를 지난 지 12년이 되었다.
12라는 숫자 자체가 너무나 낯설고 생경해서 차마 입밖으로 꺼내기조차 거북살스러울 만큼 나에게 12년이라는 세월은 도통 인정할 수가 없다.
어린 시절 주위의 어른들이 자신의 나이를 직접 말하기를 꺼려하고 출생 년도를 대신하는 것을 보며 왜 저리 복잡하게 말할까 하는 생각을 잠깐 잠깐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나도 무언가 이토록 지나치게 속절없이 놓쳐버린 세월을 대신할 다른 용어를 찾아야겠다는 안스러운 생각을 해보곤 한다.
언제인가 작년도부터 우리 집에서 오랫동안 나의 결혼생활과 함께 해온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하나 둘씩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세탁기가 그러했고, 작년도에는 결혼하던 해에 미리 사 둔 오디오의 커다란 장식장이 버려졌으며, 올해 들어서 신혼 때부터 우리 내외의 잠자리를 지탱해 준 침대가 수명을 다해 동사무소의 폐기용 스티커가 붙은 채 버려져야 했다.
그리고 어제는 12년을 묵묵히 부엌 한 켠을 지켜온 냉장고마저 냉각모터 파열과 중요 장비의 부식으로 인해 마침내 폐기 처분되고 말았다.
모든 가전제품도 그 수명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고, 새 물건을 날라주기 위해 방문한 업자에게 물어보면,
[12년이면 많이 쓰신 거네요~~'
하며 아쉬움없이 헌 우리의 가전제품을 치워가곤 하지만 웬지 그런 광경을 보며 서운함이랄까 여러 가지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은 왜일까?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을 넘긴 만큼 인류가 만든 하잘것 없는 가전제품이야 당연히 고장이 나는 법, 또 그 참에 새로운 기술이 접목된 더 편리한 제품을 구매하게 된다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움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웬지 우리 가족의 손끝에서 때묻고 무뎌지면서 1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을 함께 해 온 가구들과 그 물건들이 갑자기 치워지고 버려진다는 것이 괜히 서운하고 마음 속 작은 한 구석이 비워지는 것 같은 마음이 드니 나도 참 이상한 노릇이다.
새 제품이 들어온다니 훨씬 기쁘고 반가운데...
아이들은 새 냉장고가 들어오자 연실 문을 여닫아 보고 소리지르며 좋아한다.
집사람도 '역시 돈이 좋긴 좋네~~' 하며 자신만의 살림 영역인 부엌 살림이 새롭게 들어온 것에 만족해하는 눈치다.
그러나 나만은 웬지 서운함같은 것을 지울 수가 없다.
10년 지기 친구를 다시 못 만나게 된다면 그 때의 마음은 어떨까?
영영 이 세상에서 다시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서운함은 또 어떠할까?
하물며 생명이 없는 가구들이련만 그래도 나와 같이 이 억울한(?) 세월의 때를 특히 신혼이라는 첫 결혼의 출발을 시작하며 울고 웃었던 이 가구들이 치워지는 것도 얼마나 섭섭한가..
작년 여름 내 방에 웅장하게 자리잡았던 오디오의 장식장이 버려질 때였다.
집사람과 내가 낑낑거리며 그것을 들어 현관밖으로 옮기는 중이었는데, 딸래미 녀석이 쪼르륵 뛰어나오더니 장식장 한 켠을 쓰다듬으며,
'장식장아, 잘가~~!'
라고 한다.
어쩌면 녀석보다도 나이가 더 먹은 가구지만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에게도 낯익은 집안의 가구가 사라진다는 것이 조금은 아쉬운 모양이었다.
인간은 가전제품보다는 내구 연한이 길도록 운명지어진 존재라고 할 수 있겠다.
70년, 아니 80, 90년까지도 잘만 관리를 하고 아껴서 사용한다면 모양이나 외관은 구형 모델로 퇴락하겠지만 그런대로 쓸만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라고 하는 가구, 나라고 하는 제품을 관리하고 사는 것일까?
언젠가는 나역시 수명이 다해 어딘가로 치워져야만 할 존재이기에 남은 기간을 잘 관리해야 할텐데,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별로 딱히 자신이 없다.
먼 훗날 하늘로부터 주어진 수명이 다해 헤어짐을 맞을 때 눈물과 억울함이 아닌 뿌듯함과 최선을 다했다는 안도감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남아있는 이 세상에서의 인간들의 큰 소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조급한 마음이 또다시 작은 후회로 하루를 접게 되는 오늘이다.
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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