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할 수 없다는 것

tosoony 2006. 7. 4. 02:02

지난 5월과 6월 이 나라 시각장애인들은 유사 이래 전무후무한 뜨거운 여름을 먼저 경험했다.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던 그 밝고 화사하기만 한 5월의 햇살 속에서 무심히 봄날의 햇살 한 조각에 취해있던 그 날, 그 어느 누구도 믿지 못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시각장애인 안마사에 관한 규칙 위헌 판결!...
최근 몇 년동안 현 정부 들어 대통령 탄핵이다, 행정수도 이전이다 하면서 헌법재판소가 얼마나 힘이 세고 무얼 하는 곳인지 새삼 알게는 되었지만 그

래도 역시나 헌법은 내가 일상에서 피부에 접해야하는 법률과는 거리가 먼 일쯤이라고 여겨왔떤 나에게 이번 위헌 판결은 실상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그날부터 우리는 너무나 힘들게 하루 하루를 달려야 했다.
마포의 다리 밑으로, 아슬아슬한 다리 교각의 난간위로, 또 때로는 여의도의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 위로 쓰러지며 그 무언가를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외치고 또 외쳤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울분에 찬 분노와 좌절을 어루만져야 했고, 그들의 고통을 몸소 짊어져야 한다는 책임감에 허둥대면서도 무언가를 하기 위해 은

행동 거리로, 명동성당 앞으로 또는 대전역 광장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이 목숨을 끊었고 한 사람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는 있을 수 없는 희생도 겪어야 했다.
마침내 지난 6월 30일 임시국회 마지막 날의 오락가락하는 해프닝과 여당과의 합의를 거쳐 긴 터널과 같은 전력질주식의 어둠속 외침은 일단 휴전 상

태에 들어갔다.

아직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작금의 합의가 잘못되었으며, 더욱 힘을 모아 끝을 눈앞에서 보아야 한다고들 한다.
또 다른 쪽에서는 그러한 경랑속에서도 자기들 잇속을 챙기는 이들에 대한 비난을 일삼는 이들로 시끄럽기만 하다..

난 무엇보다 안마의 최고 실력자가 못된다.
중도에 실명하여 맹학교라는 중간 터널을 거치면서 이료 교과와 진학 공부를 더불어 하며 이쪽도 저쪽도 아닌 중간에서 눈을 비벼가며 턱에 찬 대학

진학을 준비했고, 다행히 통과 한 대학 관문을 거치면서 새롭게 터진 내 앞의 넓은 공간과 사람들, 신비한 학문의 세계에 빠져 4년을 참으로 분주하게

지냈다.
대학생이 되어서야 봄이면 내 주위에 어떤 봄꽃들이 차례로 피어나는지 알게 되었고, 군대 입대를 위해 목이 메어 기차를 타고 떠나가는 친구 녀석을

위해 술 한잔 같이 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학문의 전당인 캠퍼스 바닥이 왜 숨막히는 최류탄 자욱으로 얼룩져야 하는지도 몸소 깨달았고, 대학 동아리를 이끌면서 다른 사람을 챙기고 배려하며

일을 성사시키는 포용력도 미약하나마 체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대학 생활을 떠올릴 때면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은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일일 것이다.
나의 4년은 지금의 집사람을 떼어놓고는 이야기될 수 없을 만큼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러한 4년 동안의 웃고 울었던 그 시절을 흘려 보내면서 나 자신이 참으로 많이 변했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곤 한다.
초등학교 시절, 소위 말하는 그림자 같은 학생으로 사고를 저지르지도 않지만 나 자신을 표현하지도 않고 조용히 지낸 나의 옛 지러.
 중학교 시절, 잠시 국어에 심취해 방송 PD와 신문사 논설위원의 꿈을 쌓아가며 가슴 부풀어하다 실명을 하고 대전맹학교의 험난한 적응 시기를 거쳐

다시 서울맹의 고등부 3년을 거치는 동안 나라는 사람의 색은 숱기없는 모범생, 하라면 무조건 해야 하는 융통성없는 소심한 녀석으로 자리매김했었

다.
그러던 것이 대학이라는 공간에 오면서 크게 급회전을 했다고 자평한다.

1993년 주위의 큰 도움으로 교편을 잡을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그동안 주어진 일 속에서 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으로 자위하며 일해 온 시간, 어느 새 그 시간이 14년째라는 이해할 수 없는 시간으로 내게 되돌아왔다

.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자랑이나 입밖으로 꺼낸다는 것이 참으로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난 그동안 내가 저질러 오고 벌려왔

던 여러 일들에 만족한다.
그것이 분명 나 아닌 자들도 할 수 있는 일이었겠지만 다른 이들이 흘려 버리거나 무시했던 일이었다는 것만은 사실이니까...
콜롬부스의 달걀이라고나 할까.
요즘 내가 노조를 탈퇴하고 소논문을 스고 있는 일에 일부에서 수근거리는 것을 듣곤 한다.
곁에서 나를 아껴주는 여선생님이 그 사실에 나보다 더 격분해하는 것을 보며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그들은 내가 6년여 동안이나 노조 생활을 하면서 지금보다 더많은 자료를 만들고 경영자들과 더 친하게 지낼 때에는  왜

지금과 같은 수근거림을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다.
모든 건 그 사람이 평소 행하는 일에서 나타나는 법이고, 그 일로써 평가받는 것이니 걱정말라고 여선생을 웃으며 안심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내 스스로 자신감을 상실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안마라는 본연의 문제 바로 그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나라 모든 시각장애인에게 있어 동일시되는 상징은 바로 안마이다.
이 나라에서는 시각장애인치고 잘나거나 못나거나 유능한 현장 교사도, 복지관 직원도, 목사도, 심지어 대학 교수 조차도 이 안마라는 아이콘을 배제

하고는 설 땅이 없다.
다시 말해 내가 이곳 학교에서 교사로 존재하는 근원 역시 안마인 것이다.
얼마전 나의 아내가 안마사 위헌 관련 라디오 토론 방송을 들으며 우스개소리인양 한소리 한다.
'안마에 취미없고 pd나 논설위원이 취미인 우리 남편이 이거밖에 할 수 없게 만드는 이 나라가 도대체 뭘 한거야!'
눈을 흘기며 모르는 척하고 넘어갔지만 한편에서 마음 속 한구석이 찔린다.
난 왜 이정도밖에는 되지 못하는 것일까?
사회에서는 목숨을 건 고공 시위와 안마만이 살길이며 최적의 직업이라며 애타게 외치는데...

요즘같이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자기 암시를 주는 때가 있었을까?
학교에서는 대체로 아이들에게 긍정적이고 포괄적인 용기와 격려를 주곤 한다.
그것이 교육학적으로 상찬이라는 교육 효과를 제공하고, 미래의 아이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될 수도 있기에 그러하겠지만 우리 교사라는

사람들은 대체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자주 주곤 한다.
그러다보니 우리들은 어릴 적 한 두번쯤은 미래에 무엇이 되겠냐는 질문에,
'대통령이요!, 과학자요!...'
라는 소리를 연발하곤 한다.
물론 한 나라의 한 명밖에는 나올 가능성이 없는 아주 희박한 통계의 바램이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기특하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한다.
그 사람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요즘 우리 아이들을 대할 때면 말문이 막히고 자신감이 없어진다.
언제나 할 수 있고, 능력이 있고 가능성이 많다는 소리만 남발해온 내가 부도수표만 남발한 사기꾼은 아닌가해서이다.
'우리는 안마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안마는 시각장애인의 유일한 생존 수단이자,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수단입니다!'
'안마를 빼앗기면 맹인 생계는 막막합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쳤던 그 소리 가운데에서 나는 교사라는 양심에서, 아니 그보다는 나 자신이라는 정체성의 관점에서 생각한다.
정말 우리들은, 아니 나는 이 안마 밖에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할 수 없다...

어느 사이 우리들 입에 베인 이 네 글자가 참으로 무겁게 오늘 내 몸을 짓눌러온다.

7월3일 새벽 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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