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시각장애인의 정보의 장으로 자리매김해온 넓은마을이 마침내 새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간 넓은마을은 1990년대 전화선을 통한 모뎀 서비스를 시작으로 인터넷 도입에 따라 telnet, 웹과 telnet 연동 방식 등 여러가지 모습으로 변화하면서도 끈기있게 30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온 장수 통신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한 끝에서 저도 일부나마 몸을 담았던 적이 있는 사람으로 누구보다 시원 섭섭한 감회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에 telnet과 웹 연동 방식의 '넓은마을'의 퇴장을 앞둔 오늘, 지나간 세월의 흐름을 짧은 지면으로나마 보존하고자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사이버 통신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9년 대학 입학을 하던 때였습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 컴퓨터는 8비트의 유치한 게임이나 할 수 있는 미미한 수준의 기기가 보급되던 때였고 8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소위 XT, AT라고 하는 소위 286 개인용 pc가 하나둘 보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입학하던 해에 일부 시각장애 대학생들이 서울 회현동과 명동성당 인근에서 모여 컴퓨터 개론과 MS-DOS 기반의 운영체제 원리에 대해 시각장애 모 선배님으로부터 스터디를 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기회가 되어 당시 부모님을 졸라 당시만해도 고가에 해당하던 XT 컴퓨터를 장만하였고, 그에 더해 미국의 대표적인 외장형 음성합성기인 스피퀄라이저를 종로 세운상가에서 단체로 키판을 복제하여 장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집안에 개인용의 컴퓨터를 설치해 놓은 걸 보기 힘든 시기였기에 한동안 제가 거주하던 자취방에는 신기한 물건을 직접 보기 위해 놀러오는 친구들로 붐비곤 했었습니다.
처음엔 영문 음성 출력만 가능하던 스피퀄라이저로 MS-DOS 상에서 파일 관리와 몇 가지 유틸리티를 사용하다가 당시 도트 프린터기를 장만한 후에는 이찬진씨에 의해 처음 보급된 아래아 한글 1.0과 보석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을 사용했었씁니다.
그러던 중 전화선을 통해 PC통신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모뎀이라는 것이 보급되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설치하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여기에는 당시 KETEL이라고 하는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운영하는 통신망이 무료로 서비스를 운영하는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역시 당시 누구나 전화선을 통한 사이버상의 새로운 공간을 활용할 수 있다는데 궁금증이 생겨 모뎀을 장만하게 되었고 화면의 모든 내용을 읽을 수가 없어 대학생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가면서도 묘한 매력에 빠져 들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KETEL 가입 과정에서 모니터 앞에서 ID를 고민하던 중에 곁에서 도움을 주던 여자친구(지금의 제 아내이기도 함)를 장난스럽게 부르던 별명인 토순이(tosoony)가 떠올라 즉흥적으로 만든 것이 30여년을 한결같이 제 트레이드 마크로 오늘날까지 사용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데이콤사의 PC-SERVE에서 천리안으로 이름을 바꾼 유료 통신망에도 가입을 함으로써 본격적으로 PC통신 사용자가 되었습니다.
당시 전화망을 통한 PC통신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에뮬레이터'라고 불리는 전용 소프트웨어가 필요했는데 당시 우연하게도 비장애인이 사용하던 '이야기'라고 불리던 프로그램이 음성과 충돌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이 프로그램으로 통신에 접속하게 되었씁니다.(이후 오늘날의 이야기멀티 등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그러던 중 서울의 하상 종합 복지관을 중심으로 디지콤사에서 개발한 '가라사대' 음성합성기가 보급되면서 영어 뿐 아니라 우리말 입출력이 가능하게 되었고, 국내 시각장애인들의 컴퓨터 활용에 커다란 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가라사대' 덕분에 그동안 주변의 도움을 받던 대부분의 화면 인식과 한글 입력 작업을 혼자서 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KETEL과 천리안 접속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게시판 글을 열람하고 답변을 하거나 파일을 다운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가정용 전화망과 저속의 모뎀을 통해 통신망에 접속해야 했기에 통신망 사용 중에는 온 집안이 전화불통 사태가 되어야 했고 4, 5메가 정도의 mp3 음악 파일 하나를 다운받는 데에도 여러 시간이 소모되었기에 큰 파일을 다운받기 위해서는 아예 밤새 컴퓨터를 켜두고 잠을 청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월 청구되는 전화비 폭탄으로 인해 가족과 마찰이 빈번하게 빚어지는 등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이후 정부에서는 PC통신 전용 전화번호 014X0)를 만들고 전화 비용도 할인해 주는 등 대책이 마련되기도 했습니다.)
KETEL은 이듬해 지금의 한국통신에 인수되어 '하이텔'이라는 이름으로 유료화되었고 나우누리와 에듀넷까지 서비스를 개시함에 따라 1990년대 후반까지 전화와 모뎀 기반의 PC통신 시대가 펼쳐지게 됩니다.
특이한 건 당시는 비장애인과 장애인 모두 공히 MS-DOS와 텍스트 기반의 PC통신을 사용했었고 폰트라는 기술이 활성화되기까지 게시판에 글 읽고 쓰기와 다운로드한 유틸리티를 사용하는데 있어 시각의 장애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1990년대 초 하이텔의 교사 동호회 시삽을 비롯하여 에듀넷 특수교육 담당 부시삽 등 여러가지 커뮤니틷들에서 관리자로 활동할 수 있었고, 다른 회원들은 제가 번개에 나타나고서야 시각장애인인줄을 알고서 당황해하곤 했습니다.
그런 점이 제게는 너무 매력적이고 시각의 장애를 해소할 영역은 이 사이버 공간을 통한 공평한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이후에도 여러가지 사업을 나서서 하게 되었습니다.
1994년 천리안의 여러 동호회들을 돌아다니던 중 지체장애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모두하나'라는 동호회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 그 동호회는 형식적으로 각각의 장애 영역별로 게시판을 만들어 두고 있었는데 시각장애 영역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버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이곳이야말로 시각장애인들의 정보 공유의 장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모두하나' 동호회 시삽에게 게시판 사용 협조를 구했고 쾌히 승낙을 받았습니다.
다음으로 주변에서 천리안을 사용하고 있는 몇몇 시각장애인들에게 활용 협조를 받아 마침내 '케인즈' 게시판이라는 이름으로 시각장애 전용 게시판 부시삽으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천리안은 나름 부담되는 월 사용료로 인해 주변의 무료 사설 BBS에 비해 제공되는 서비스나 유틸리티의 품질이 상당히 높았기에 어느 정도 컴퓨터와 PC통신에 조예가 있는 시각장애인들이 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의 부탁에 따라 하나 둘 시각장애인들의 접속이 늘어가면서 게시물 수가 축적되게 되었고 이에 재차 입소문이 늘어나 상당수 시각장애인들이 가입하면서 어느 사이 나름 시각장애인들의 정보 공유와 유용한 질문과 답이 모이는 10000여개의 게시글이 존재하는 미니 커뮤니티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천리안 '모두하나' 시삽의 지원으로 케인즈 전용 자료실과 추가적인 게시판들이 속속 만들어졌고, 늘어난 시각장애 게시판 사용자들만의 첫 번째 번개가 1995년 제가 있는 대전의 동학사에서 1박 2일로 개최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갖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1990년대 중 후반까지 천리안의 '케인즈' 게시판은 넓은마을이 보편화되기 전 시각장애인들의 사이버 정보 공유의 장으로 의미있게 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서울 하상 종합 복지관에서 컴퓨터와 점자프린터, 가라사대 보급 등 정보화에 앞장서던 서인환씨가 1993년 한국장애인재활공학센터를 개소하고 1996년부터 사설 BBS 프로그램을 활용한 자체 PC통신망을 구축하고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넓은마을'의 효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넓은마을은 천리안이나 하이텔과 마찬가지로 전화와 모뎀 접속으로 서비스를 운영했는데 무엇보다 서비스 가입과 활용이 무료였기에 천리안 가입을 주저하던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가입을 하게 되었고 짧은 시간에 상당수 시각장애인들의 전용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사회적으로 소프트웨어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여 상용 또는 제한적 상용 프로그램들도 고민없이 PC통신망 자료실에서 구할 수 있었는데, 초기에는 유료인 처리안 '케인즈' 자료실에 등록된 자료들이 넓은마을 자료실로 옮겨졌으나 나중에는 회원수가 급증하면서 넓은마을 자료실이 시각장애인의 대표적 자료실로 역할을 하게 되었고 '케인즈' 게시판은 차츰 사용 빈도가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기억해야 할 두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GUI 기반의 윈도우95의 출현입니다.
당시까지 컴퓨터 운영체제는 CUI 기반으로 깜박이는 모니터 커서 앞에서 사용자가 사전에 암기한 명령어를 오타없이 완벽하게 입력해야만 작동할 수 있었기에 사용자에게만 부담이 큰 운영체제였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러한 텍스트 기반의 모든 운영 방식 덕분에 시각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똑같은 프로그램을 다운받고 유틸리티로 원하는 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5년 마이크로소프트사가 출시한 그래픽과 마우스 중심의 윈도우 95는 이러한 기존의 관념을 한순간에 바꾸어 놓았고 사람들은 명령어를 외우거나 일일이 타이핑치는 대신 전체 메뉴를 펼쳐놓고 원하는 메뉴를 손가락으로 클릭하기만 하면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는 교환원이나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던 다수의 시각장애인들이 한순간에 해고되었고, MS-DOS 기반으로 모든 작업과 학생들의 교육을 해오던 저같은 전맹 교사들은 더이상 아이들을 지도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음으로는 PC통신 접속 방식의 변화입니다.
1980년대 이래 전화와 모뎀 기반으로 텍스트 중심의 서비스만을 지속해오던 PC통신망 업체들이 그래픽 중심의 운영체제가 활성화됨에 따라 텍스트 위주의 서비스 외에 윈도우상에서도 마우스로 동일하게 통신망에 접속하여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별도의 프로그램을 제공하여 텍스트 기반 시스템과 연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으로 천리안 등에서 먼저 시작된 변화는 다른 통신망으로도 확산되었고 이후 90년대 후반 인터넷의 급격한 보급에 따라 전화망 접속 방식 폐기와 함께 잠시 telnet 접속과 웹 접속을 허용하다가 telnet 접속을 없애는 수순을 밟게 됩니다.
*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이후 telnet 관련 이야기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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