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스케치

또 하나의 천사

tosoony 2012. 5. 7. 07:47

  "세상에 어쩜 이런 천사가 또 있담!"

  집근처 마트의 주인 아주머니께서는 오늘도 같이 장을 보고 있는 아내를 보며 연방 생글거리며 덕담을 건넨다.

  "선생님은 복도 참 많으세요. 이런 이쁜 색시를 곁에 두고 사니..."

  "맞아요. 저도 이 예쁜 제 천사가 날라갈까봐 언제나 이렇게 꼭 팔짱을 끼고 다닌답니다."

  능청스럽게 맞장구를 치는 나를 이끌고 민망해하며 아내는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온다.


  천사와 같은 내 아내를 만난 건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대학교에 입학을 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봄볕이 따스한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 3학년 때 뜻하지 않게 실명을 한 후 부모님의 보살핌 속에 대학 진학이라는 기쁨을 맛본 것도 잠시, 실명이라는 장애보다 이 큰 캠퍼스를 스쳐가는 수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어떻게 학업을 유지해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줄곧 나를 두려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그 즈음 나이는 동갑이었지만 같은 과 2년 선배인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처음 아내는 단순히 어수룩해 보이는 초보 시각장애인을 돕겠다는 목적으로 내 생활과 학습에 도움을 주었으나 이내 우리 둘은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보고 싶은 사이로 발전해갔다.

  이후 아내는 학창시절 내내 나의 곁에서 나의 눈이 되어 주었다.

  시각장애인에게 가장 힘든 부분은 무엇보다 정보접근에 취약하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과제와 레포트 작성에서 시각의 장애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는데, 아내는 당시 내가 읽어야 할 모든 전공 교재와 자료를 읽어주었으며, 하루 종일 도서관을 뒤져 복사해 오곤 했다.

  그런 다음 아내는 자신 역시 졸업을 앞둔 학생임에도 늦은 시간까지 내 전공서적 전체를 녹음해 주곤 했다. 어떤 때는 밤새 녹음을 하느라 목이 쉬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몸살에 걸리는 때도 있었고, 또래 여자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을 갖지 못해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아내의 정성으로 나는 4년 내내 장학금을 도맡아가며 받을 수 있었고, 과 차석 졸업이라는 작은 영광까지 안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결혼과 맹학교 교사 임용이라는 행복함 속에서도 아내에게 주어진 힘든 삶의 무게는 달라진 게 없었다. 아내는 매일 저녁 수업에 필요한 여러 참고 자료를 워드프로세서로 입력하거나 녹음해 주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고 수업 이외의 업무 처리를 위해서도 아내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다.

  다행히 대학 시절부터 틈틈이 익혀 둔 컴퓨터 지식으로 시각장애 학생들의 컴퓨터를 지도하면서 조금씩 아내의 도움에서 벗어나 컴퓨터 스크린리더와 인터넷을 통해 대략의 업무와 교재연구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초기 OCR 프로그램인 뉴로 OCR과 아르미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여 아내의 어려움을 덜어 주겠다는 시도를 하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장애인을 위한 보조공학 기술에 대한 사회적 인식 부족으로 비용만 낭비한 채 쓸모는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맹학교 임용 당시 나의 전공은 중등 일반사회로 내게는 다른 여타의 과목보다 더욱 많은 시사 정보와 자료가 필요했으나, 내 힘으로 다양한 자료를 준비하기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2000년 들어 초고속 인터넷이 일선학교에 보급되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대다수 정보가 전달되며, 정부 차원의 장애인을 위한 다양한 디지털 공학기기가 보급되면서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 기회와 학습 환경도 크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요약된 일부분이거나 불확실한 정보이기 일쑤였고, 전문적인 학습을 위해서는 여전히 도서 전체를 완독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각장애인의 활자화된 첨단 정보접근에 대한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올해 들어 아내는 몇 년전부터 욕심만 낸 채 주저하기만 한 나의 대학원 박사 과정 입학을 성사시켰고, 한동안 잊고 살았던 고달픈 생활로 접어들어 있었다.

  그 즈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동안 지지부진했던 한국형 OCR 소프트웨어가 개발되었고, 특히 시각장애인용으로 특화된 '소리안'이라는 전문 OCR이 개발되었다는 소식은 목마른 우리 부부에게 오아시스같은 사건이었다.

  원래 알파벳을 사용하는 서양권에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OCR 기술이 보편화되어 학습이나 정보접근에 고통을 겪는 사례가 거의 없지만 국내에서는 한글과 영어는 물론 한자까지 처리해야 하는 고도의 기술적인 문제로 실효성있는 소프투에어가 개발되기는 요원하다는 전문가들의 평에 나역시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반신반의하며 신청한 '소리안' 광학문자인식장치 보급 신청이 뜻하지 않게 선정으로 이어지면서 내 생활은 급격히 달라지게 되었다.

  우선 놀라운 것은 그간 국내에서 개발된 OCR과 달리 '소리안'은 시각장애인 스스로가 TTS에 따라 스캐너와 소프트웨어의 모든 기능을 독립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설계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밖에 JPG 등 다양한 형식의 그림 파일을 해석한다거나 여러 장의 스캐닝 자료를 빠르게 일괄 처리하여 문자화할 수 있는 기능은 과거에 비해 크게 신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나에게는 활자로만 출력되는 전공 논문 자료는 물론 빼곡이 쓰여진 전공 서적들을 혼자서 책장을 넘겨가며 읽는 재미가 다시 생겨났다.

  아내와 함께 시내의 대형서점을 드나들면서 복도에 서서 신간서적을 읽는 사람들을 부러워했던 때가 있었다. 시각장애인은 언제나 이렇게 원하는 도서를 그 즉시 읽을 수 있는 때가 올 수 있을까 하며 대화를 나누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2011년 새롭게 만난 '소리안'은 이런 시각장애인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에 충분한 기기라고 하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20여년 간 내 곁에서 한결같은 천사로서 내 눈과 손이 되어 애환을 같이 했던 아내의 짐을 덜어 주고, 지식을 공유하며 기쁨을 함께 할 또 하나의 '천사'가 뒤늦게 내 곁에 생겨났다는 작은 기쁨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척박한 국내 장애인 IT 환경에서 소외된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 확대와 정보화를 위해 꾸준하게 본 사업에 투자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은 담당자와 업체 관계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 2011년 22월 정보화 수기 응모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