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팝송에 푹 빠져지내던 시절이 있었다.
유명한 팝가수 중에 '스티비 원더'라는 시각장애인 아티스트가 있었는데, 빌보드 차트 1위를 여러 번 차지하며 낯익은 음악이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오곤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즈음은 나도 실명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라디오만 붙들고(?) 살던 때라 '2시의 데이트 김기덕입니다'에서 가수 소개가 있을 때마다 언급되던 '시각장애인'이라는 말과 음악성에 대한 극찬에 내 일인것처럼 귀가 솔깃하곤 했다.
그러나 그런 극찬어린 말을 들을 때마다 드는 의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시각장애인으로 저렇게 뛰어난 능력을 맘껏 발휘하고 방송에 나오는 그의 음악을 아무렇지 않게 즐기면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편에서 자기 나라의 시각장애인에 대해서만큼은 왜 지독하게 편견과 차별을 하는 것일까? 였다.
어제 MBC TV 9시 뉴스데스크의 앵커 하나가 중도 하차했다.
방송사의 프로그램 개편에 따른 진행자 교체나 프로 변경이야 늘상 있는 일이고 광고에 의존하는 상업성 방송의 속성상 인기도에 따라 새로운 방송 아이템이 출연하는 것 또한 그리 특이한 사항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방송사의 앵커 교체가 많은 국민에게 회자되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상업적 논리에서만 출발한게 아니라는 사실 때문이라 하겠다.
특히 신경민 앵커가 진행한 뉴스데스크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는 자기만의 색깔있는 클로징 멘트를 구사하여 시청자의 뉴스에 대한 갈증과 혼란을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준다는 점이었다.
이미 신앵커의 이같은 진행은 지난 제야의 종 방송 보도나 장자연씨 관련 언론사 비리, 청와대 성접대 파문 등 힘있는 권력층의 오만함을 한 문장으로 일갈하여 사회의 큰 반향을 일으켜왔던 게 사실이다.
그리하여 많은 시청자들은 신앵커의 클로징 멘트를 보기 위해 tv 앞을 떠나지 않고 뉴스를 끝까지 지켜본다는 말까지 생겼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였다.
듣기 싫은 소리를 방송의 프라임 시간에 버젓이 쏟아내는 앵커 하나의 입이 윗 분들의 심중을 그렇게나 건드리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오늘 mbc의 목줄을 쥐고 있는 거대 권력에 떠밀려 민주주의의 작은 보루 하나가 또한번 퇴행을 거듭했다.
오래전, 아마 1980년쯤이었던 것 같다.
늦은 밤 공부를 마치고 우연히 스위치를 켠 흑백 TV 수상기속에서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이라는 노래를 울먹이며 부르는 이은하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마나 감정이 담겨 노래를 부르기에 저리도 펑펑 울면서 노래를 다 하는거지?
그리고 나는 다음날에야 그것이 TBC 동양방송이 강제 통폐합이 되기 전날밤 마지막으로 한 고별 공연 장면 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지난밤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 멘트와 30년전의 이은하씨의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내세운 방송 언론사 통폐합 근거는 경쟁력 강화와 집중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오늘 MBC가 공식적으로 내세운 논리 역시 위기에 빠진 방송사의 경쟁력 재고와 공영성이었다고 한다.
오늘 국민들은 이들 두가지 사례의 논리 모두를 믿지 않는다.
하나하나의 개성과 차이를 용납하지 못하고, 오직 일사분란한 규율과 통일만이 존재하는 사회.
개인의 정체성이나 독창성은 허용될 수 없고, 떠들썩한 토론은 소란한 무질서로만 치부되는 사회에서 한 개인은 오직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보잘것없는 부품일 뿐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경제위기 극복에 찬물을 끼얹는 매국노요, 거기에 더하여 목소리까지 높이는 사람은 좌파 빨갱이가 될 뿐이다.
요즘 공무원이나 관공서에 근무하는 이들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대부분 얘기를 들어보면 위에서 내려오는 공문이나 지시사항의 양이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를 뿐 아니라 뻑하면 지시를 어기거나 완수하지 못할시 불이익이나 처벌을 감수하라는 문구가 반드시 따라붙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그간 나태한 공무원들의 규율을 잡는다는 장점이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정부와 관이 선도하고 방송 언론, 사회 문화계를 아우르는 경직과 무언의 폭력성은 이제 우리 자신의 턱밑까지 올라와 있다.
이 글을 읽는 분 중에는 신경민 앵커의 멘트가 공정성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강조하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권력과 사회부조리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다. 정부 정책에 대해 비판적자세를 취한다 하여 공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특정 정권에는 비판만, 다른 정권에는 옹호만 하는 이중적인 잣대야말로 바로 공정성의 판단기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도 저도 아닌 기계적인 중립만을 취한다면 그것은 언론이 아니라 앵무새가 아닐까?
몇 년전 미국의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흑인 여성에, 어릴적 성폭력까지 당한 경험을 고백하면서도 방송에서 자신만의 색깔과 멘트로 국민을 사로잡는 여성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 큰 부러움으로 전해졌던 것으로 안다.
우리는 남의 나라 가수는 시각장애인이라도 상관없이 음악성에 빠져 박수치고 흥얼거린다.
그러나 그 가수가 우리나라의 가수로 돌변하면 윗 분의 심기를 건드리고 시청자의 기분을 망치는 존재로 바뀌며, 잘해야 겨우 장애를 극복한 예외적인 존재로 잠시 화제에 올라오는 대상이 될 뿐이다.
우리는 책 속이나 외신에 나오는 미국땅의 오프라 윈프리나 유명 앵커인 월터 크롱카이트의 비판적 언사에는 열광한다.
하지만 국내 뉴스데스크 앵커가 말하는 20초짜리 클로징 단문에조차 색깔과 이분법의 색이 바랜 이념만을 들이댄다.
그리고 그 속에 장애인이라는 단어는 설 자리가 없다.
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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