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의 이해

언어에 대한 인권 감수성은 어디까지 와 있는가

tosoony 2018. 12. 31. 11:29

2019년 기해년 새해가 밝았다. 독자 여러분의 가정과 사업에 물 댄 동산처럼 풍성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새해의 첫 문을 열면서 장애인 복지의 내실을 다지는 데 기초 토대가 되는 인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인권은 인권 감수성에서부터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권 침해나 차별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면 해결에 대한 노력을 기울이지 못 하기 때문이다. 장애인 당사자가 인권 침해나 차별을 장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나 불편이라고 스스로 받아들인다면 인권 회복은 물 건너간 것이나 다름없다. 의사가 가장 고치기 어려운 병은 환자 스스로가 병이 아니라고 인지하여 의사를 찾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던가.

한때 장애가 없는 사람을 가리켜서 정상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던 적이 있었다. 당연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차별적 용어임을 누구나 인지하고 있다. 장애가 없는 사람을 정상인이라 부른다는 것 속에는 장애인은 정상적이지 않다비정상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스스로가 이 같은 비인권적 생각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인권 감수성의 부족도 있었겠지만 뿌리 깊은 전통적 사상에서 기인한 것도 무시 못 할 원인 중 하나이다. 고대, 중세만 해도 종교적 관점이 부각되었기 때문에 장애는 죄의 결과나 신의 징벌로 생각해 왔었다.

근대에 들어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산업화와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는 장애라는 것이 질병과 사고 등 신체적·정신적 손상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장애인에 대한 생각도 바뀌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사회과학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장애가 장애인 자신의 개인적 비극이나 불운이라기보다는 사회 환경의 결여에 초점이 옮겨지면서 장애인에 대한 시각도 크게 개선돼 가고 있다. 사회 환경이 비장애인 중심으로 구조화돼 있기 때문이라는 관점인 것이다.

1990년대 중반 루스벨트 국제 장애인상을 수상한 김영삼 대통령은 상금 5만 달러를 기반으로 국회에서 특별 예산 10억을 승인받아 올해의 장애극복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모범적인 장애인을 뽑아 시상했다. 당시엔 상의 명칭에 대해 별 이의가 없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됨에 따라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장애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수용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이 땅의 모든 장애인은 살아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이미 장애를 극복했다는 말인데, 또 무슨 극복이냐는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2009년부터는 올해의 장애인상으로 명칭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각장애 기관에서 내놓는 공지사항을 살펴보면 인권적 표현보다는 시혜적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제일 흔한 표현 중의 하나가 서비스 신청 대상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복지관은 베푸는 입장이고 시각장애인은 그것을 받는 입장으로 구조가 짜인 셈이다. 일대일의 관계가 아니라 주고받는 상하관계가 내재되어 있다. 실상은, 시각장애인은 복지관에서 베풀어주는 것을 받는 입장이라기보다는 복지관의 서비스를 이용하는 주체인 것이다. 따라서 서비스 대상이라고 표현할 것이 아니라 서비스 이용인이라고 바꾸어 공지해야 함이 더 적합하다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서비스 제공이라는 표현보다는 서비스 이용이라고 하는 것이 더 인권적 표현이라 하겠다.

복지 시책 안내서를 봐도 마찬가지다. 복지 시책 내용을 열거한 뒤 지원 내용’, ‘지원 절차를 소제목으로 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런 표현은 장애인을 대상자로 세운 뒤 하해와 같은 은혜를 베풀어주겠다는 권위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겠다.

사업명에 재활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보다는 자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인권적 표현이라 본다. ‘재활은 장애인을 대상화한 것이지만, ‘자립은 장애인이 주체가 되기 때문이다.

요즘 시각장애 기관의 사업 목적이나 비전, 미션을 들여다보면 장애 이용인 중심이라는 것을 기치로 내건 곳이 여럿 있다. 참으로 올바른 선택이다. 그 진정성을 보여주려면, 사용하는 용어의 선택에서부터, 그리고 하나하나의 사업을 집행함에 있어 이용인 중심으로 설계되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검토해 볼 일이다.

기해년에는 이름뿐인 이용인 중심이 아니라, 명실공히 시각장애인이 주체가 되는 이용인 중심의 시각장애 기관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 본다.

 

201911일자 점자새소식 사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