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데자뷰

tosoony 2015. 6. 15. 02:43

보건학을 강의하다 보면 인구론 중에서 역사적으로 유럽의 인구가 급감한 사례와 그 원인에 대해 질문하곤 한다.
학생들은 대부분 십자군 전쟁이나 1, 2차 세계대전 같은 그러그러한 전쟁을 떠올리곤 한다.
그러나  그것이 몇 차례에 걸쳐 유럽 전역을 휩쓴 페스트라는 일개 전염병 때문이라는 걸 대부분은 잘 모른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다고 한 페스트는 당시 사람들을 페닉 상태로 몰아갔고 알 수도 없는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산속으로 수도원으로 숨어들게 만들었다.
우리가 잘아는 서양의 문학작품인 '데카메론', '켄터베리 이야기'등은 이 당시 역병을 피해 숨어든 곳에서 사람들끼리 요샛말로 음담패설하던 내용을 모아놓은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웃으며 들었다.
 의학적 지식이 없던 5, 600여년 전에야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
지금처럼 손안의 스마트폰 터치 하나면 내가 있는 위치와 가고자하는 경로가 펼쳐지고, 원하는 백과사전급 전문 정보가 쏟아져 나오며, 필요하면 눈앞에 보이는 병원 건물에 들어가 주민번호 숫자 하나 부르면 곧바로 3000원도 안되는 돈만 내고서 최적의 치료를 받을 수도 있는 세상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보름이 넘도록 이 나라를 맨붕 상태로 몰아가는 현상을 보면 지금이 과연 2015년인가, 1500년대 중세 말기인가를 구분하기 어렵다.
마치 서로의 몸에 눈에 안보이는 병듄이라도 있는 듯, 불안한 눈빛으로 위아래를 쳐다보고, 곁에 앉은 이가 헛기침이라도 할라치면 황급히 옆자리로 물러나 버린다.
어제까지 부와 존경의 상징인 의사 아버지를 둔 자식이 아버지가 종합병원에서 일한다는이유만으로 학교에서 왕따로 전락하고, 같은 도시 안에 대학병원이 있다는 것만으로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일대의 학교들이 줄줄이 휴교를 선언한다.
매일아침 천 명 가까운 아이들이 드나드는 학교 안과 바깥 중에서 어디가 더 안전한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등교가 끝나면 사람들은 철로 된 교문을 닫아버린 채 외부인이 올까 봐 숨죽여한다.
그것도 모자라 모든 음식점과 쇼핑몰, 행사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파리만 날리는 폐허가 된 음울한 도시를 매일 목도하고 있다.
물론 신종 감기라고 하는 메르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시점에서 각자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뭐라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첨단 과학과 2000여년을 거쳐 인간들이 쌓아 온 문명의 열매를 누리고  있다는 우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금의 일들은 너무나 비이성적이고 나약하기 그지없어 보인다.
 실제로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우리도 짐을 싸서 산속으로 들어가야겠다는 페닉 상태에 빠지지 않을지 누가 장담하랴~~

메르스에 밀려 화제가 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재난은 가뭄이다.
사상 유례없이 바닥을 드러낸 소양호의 몰골, 밭농사를 망쳤다며 갈아엎는 농부의 한숨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적 난국 속에서도 초기부터 잘 눈에 띄지 않는 분들이 있다.
낯선 땅으로부터 전염병을 몰고 온 이를 별 것 아니라 치부하고, 감염이 일파만파 퍼지는 병원명을 공개해선 안된다 하여 전국 확산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하고, 가족의 병문안을 간 죄로 준비되지 않은 소중한 목숨을 빼앗기는이들이 자고나면 뉴스에 떠올라도  그 분들은 여전히 별 일 아닌 듯  조용하시다.
그러면서도 돌연 지자체 단체장의 발빠른 행동에는 발끈하며 tv 카메라 앞에 나서려 한다.

그 옛날 조선시대의 왕들은 나라에 기근과 역병이 창궐할 때면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며 머리를 풀고 고개를 조아렸다.
감염 병균이 무엇인지, 어떻게 진단하는지 모두 알고 있는 이 시대에 국민들은 왕에게 머리풀고 엎드리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몇 달 동안 내리지 않는 비가 위정자의 탓도 아니요, 온난화와 기상이변 탓이라는 것쯤도 국민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순간 부글거리는 초여름의 무더위보다 국민들의 마음을 들끓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백성들의 고통이 남의 일이 아니라며 앞장서 대처하고 함께 손을 잡고 해결을 위해 애쓰는 그 분의 모습이 아닐련지..

오늘 우리는 미증유의 국가적 재난 앞에서 허우적대는 무능한 이 정부를 보며 학습된 하나의 두려움을 느낀다.  
작년 봄, 차가운 바다에 수백명의 꽃같은 아이들을 몰아넣고도 우왕좌왕하던 파렴치하고 나약한 그들, 그 데자뷰...
어쩌면 4천만 국민을 다시금 역병이라는 바다속으로 또 밀어넣을지 모른다는 그 두려움 말이다.
 
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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