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하느님의 경고

tosoony 2011. 3. 19. 23:27

지난 한 주 우리는 옆 나라에서 생긴 끔찍하고 불행한 재난을 목도했습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아이폰 뉴스 어플에서 시시각각 뜨는 일본의 대참사 소식과 방사능 위기 속보 단신을 볼 때마다 덜컹 가슴이 내려앉는 게 몇 번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많은 생명을 한 순간에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쉽지 않을 만큼의 엄청난 사람들.

그러나 침묵만 해온 자연은 한 순간에 그들 모두의 목숨을 흔적도 없이 앗아갔습니다.

그리고 발달된 현대 문명은 그 날의 악몽을 현실감있는 영상으로 살아남은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난 한 주 그러한 모습을 보며 괜히도 우울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그들과 가족이 참으로 안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정말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준비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이들이 얼마나 후회스러울까 하는 생각에서였다고 하겠습니다.

삶의 시작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겠지만 인간이 인생의 끝을 정리하고 준비할 수 있다는 것만큼 작은 행복이 또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그 끝을 지금도 모르기에 사소한 일에 마음아파하고, 뻔한 일로 소중한 이들과 다투고 있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아이들은 tv속 생생하게 드러나는 스나미와 지진, 원전 폭발 위기를 최근 개봉한 블록버스터 하이라이트 정도로 여기는 듯합니다.

일부 어르신 가운데는 수 십년전 그들이 우리에게 자행한 고통과 만행을 생각하면 불쌍할 게 없다는 말도 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글쎄요..

저 역시 일제시대를 겪으면서 그들의 악행을 경험했다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를 미력한 인간입니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의 고통을 보며 가슴아파하고 눈물을 조금이라도 흘릴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동물과 달리 나 자신의 인간성이라는 최소한의 보루를 아직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또 그것을 가슴에서 놓치 않고 유지하려고 이성으로 애쓰고 고민하는 마음을 유지할 때 언젠가 내가 당하는 고통을 보고 또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까요?

어려움에 처한 나에게 누군가가 너도 예전에 나한테 얼마만큼 밖에 해주지 않았으니 나도 이만큼만 해주련다라는 말만큼 우리에게 비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며칠전 우리나라의 대표 원로 목사라는 분이 공개석상에서 언급한 '하느님의 경고' 발언은 정말 각박한 이 시대 우리가 마지막으로 기대고 의지할 기준은 과연 있기나 한걸까라는 크나큰 회의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어릴적 읽은 동화책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아마 2차대전 당시 프랑스 신부가 다친 나치 병사와 프랑스 병사 모두를 숨겨주고 치료해 준 일화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도덕과 윤리에 대한 명확한 잣대가 서지 않던 때였지만 나중에 닥칠 곤욕을 알면서도 생명을 위해 앞장 선 신부님의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다고 기억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아이들이 읽을 동화책에는 과연 무엇을 담아야할까요?

 

 

토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