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스케치

어느 시각장애인의 보행기 2

tosoony 2009. 8. 6. 00:42

  누가 그러던가.

시각장애인은 장수는 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이라고...

그 이유인 즉, 평생 시각이라는 대표 감각을 잃은 채 살아가기 위해 남은 청각과 촉각, 후각을 총동원해 온 신경을 집중하려다 보니 제 명에 못산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하루 중 그런 용(?)을 꼭 써야 하는  시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출퇴근을 위한 보행 시간이라고 하겠다.

이젠 어느 정도 익숙도해져 편히 다닐 수 있을 것도 같으련만, 날마다 새로운 장벽이 출몰하는 것은 예사요, 시끄러운 주변 소음으로 뻔히 아는 길조차 헛갈리게 만들기 일쑤니 이건 전쟁이 따로 없다.

그나마 이런 난리통 속에서 내 몸을 가눌 수 있게 의지가 되는 것이 흰지팡이 그 녀석이 아닐까 한다.

보잘것 없고 딱히 재활보조기기라고 말하기조차 뭣하게 단순하게 생긴 물건이지만 손 끝을 통해 전해져오는 흰지팡이의 둔탁한 느낌을 통해 그나마 위험을 예감하고 대처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소중한 물건이란 말인가.

얼마 전  근 10여 년전에 구입해서 사용해 온 이 흰지팡이를 아쉽게 새로운 녀석으로 바꿔야 할 일이 생겼다.


20여분이 걸리는 통근 보행길에는 유독 홈플러스 상가와 대단위 아파트, 중학교, 공원 등 다양한 지역을 지나쳐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통행인들과 자주 접촉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흰지팡이 보행이라는 것이 탱크처럼 나 혼자 밀어붙이기만 하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주위의 통행인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귀를 기울여 다른 이들의 발소리나 대화 소음을 들어가며 적절히 페이스를 조절해야 하는 것이기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하루는 공원과 차도 사이의 인도를 따라 퇴근을 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내 왼쪽으로 펄쩍 날아들어오더니 내 흰지팡이 위에 떨어진 것이었다.

"아이쿠 이게 뭐래!"

순간적으로 내 손에 들린 흰지팡이의 몸통 부분이 휘청하더니 타원형으로 휘어져 있었다.

"저, 정말 죄송합니다"

문제의 괴물체란 바로 한 남자 중학생의 발이었던 것이다.

사건의 전말인 즉 내가 인도 중앙을 따라 표준 보행법을 지켜가며 좌우로 흰지팡이를 움직이는 동안 뒤따라 온 남학생이 나를 지나쳐야겠고 내 보행에 방해는 주지 말아야겠다는 단순한 생각에 내 흰지팡이끝이 반대편으로 향한 사이 냅다 몸을 날려 건너 뛴다는 것이 그만 운 나쁘게 되돌아 온 흰지팡이 몸통 위에 몸이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어이없어 하며   다시 한번 봉변을 당한 지팡이를 만져 보았다.

일직선이던 녀석의 몸은 척추 만곡증에 걸려 불쌍한 모습으로 둥그스름하게 되어 있었고, 남학생의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계속 내 귀에 맴돌았다.

적당히 힘을 주어 응급치료(?)를 해보았다. 다행히 조금씩 호전은 되었고, 외관은 흉하지만  그냥 저냥 짚을 만은 할 것 같았다.

그런 다음 연실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는 남학생에게 그냥 가라고 했다.

어쩌겠는가, 고의도 아니고 나를 배려하려다 생긴 일이고, 변상하라고 요구할 대상도 아닌데 말이다.

허리가 휘어진 녀석에 의지해 겨우 겨우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결국 흰지팡이를 새로 구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남학생의 경우는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다.

내가 제일 신경을 쓰는 부분은 바로 자전거다.

그 옛날 실명하기 전까지 자전거는 나에게도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요즘 들어 엉뚱하게 자전거가 새로운 녹색 미래의 대표 주자 취급을 받아 인기가 높아졌지만)

하지만 실명한 뒤 흰지팡이 보행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된 내게 있어 요즘 자전거는 거의 공포의 대상이다.

주택가 인근이다보니 대부분 초등학생이나 주부, 노인 분들의 놀이, 운동용으로 이용되는 자전거 행렬은 인도, 차도 구별 없이 종횡무진 사방에서 튀어나오기 일쑤인데, 으레껏 보행자가 자기를 피해갈 것이라는 무의식에 빠져있는지 아니면 흰지팡이 진자 운동의 콤파스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도통 모르는 듯 무조건 달려드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앞뒤 안가리고 곁으로 달려오는 자전거 바퀴속에 빨려들어간 흰지팡이와 부채살의 종말을...

 평소 이러한 불상사를 막기 위해 '차르르르' 하는 자전거 페달 소리에 유독 귀기울이며 걷곤 하는데, 이것도 주위가 여러 소음으로 시끄러울 때에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복지관으로부터 새 7단용 흰지팡이를 받아 든 지 이틀 째 되는 날이었다.

새 물건의 딱지가 제대로 떨어지지조차 않은 반짝이는 흰지팡이를 짚고 아파트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공포의 자전거 한 대가 내 곁을 부리나케 지나갔다.

"어~" 라는 어린 남자 아이의 소리가 아스라히 사라지는 것을 들으며 순간적으로 내 흰지팡이 끝이 무언가에 짓밟히는 기분나쁜 느낌을 감지했다.

잠시 후 들어올린 흰지팡이는 마지막 단끝이 조금 휘어져 있었다.

정말로 말문이 막혔다.

이건 뭐 누군가 일부러 새 흰지팡이를 사기를 기다려 일을 감행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절묘한 타이밍의 연속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또다시 응급처치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난히 허탈하기만 했다.


어쩌겠는가...

오래 살려면 신경끄고 살아야지~~ ㅋㅋ..


토순이.


- daum 블로그 '토순이의 오늘을 생각하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