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대통령 시계

tosoony 2009. 6. 18. 00:57

 2007년 4월 4일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일 지도 모를 우연한 계기로 청와대 행사에 초대를 받았다.

당시 국회에서 어렵게 통과된 장애인 차별 금지 및 권리 구제에 관한 법률안 서명식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주관으로 있었는데, 이 날 국민 참여단의 일환으로 자리를 함께 하게 된 것이었다.

여러 단계의 보안 절차를 거쳐 식장에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식이 시작되었는데, 노무현 대통령이 서명을 막 하려는 순간 돌발 사고가 일어났다.

국민참여단이 자리한 관중석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 두 명이 갑자기 대통령 눈앞까지 달려나와 플래카드를 내저으며 구호를 외친 것이다. 

당황한 장내 혼란에도 불구하고 노 대통령은 정중히 자리에 계시라는 말을 하며 식을 이어가려 했고 그들이 재차 '대통령님, 저희들의 말씀을 들어 주십시오'라며 주위의 제지를 무시하자 '말씀을 안 들으시면 바깥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엄한 대통령의 멘트와 함께 잠시 후 그들은 경호원에 이끌려 행사장 바깥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장차법에 대한 서명식과 각 부 장관들의 복지 관련 보고 및 대통령과의 질의 응답 등의 순서가 진행되며 행사가 마무리된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국민참여단으로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장애인 차별 금지 및 권리 구제에 관한 법률에 대해 피상적인 일면만 들어왔던 나는 솔직히 서명식 자체에 큰 기대를 갖지 않았었다.

특히 당시 보건복지부가 치적으로 내세운 내용 중 LPG 차량 면세액을 떼내어 노인복지 수당 등을 올려준 정책 등에 대해서는 그 이전부터 하석상대라며 비판을 삼아온 터라 행사의 내용보다는 영빈관이 어떤 곳인가라는 호기심을 충족하겠다는 목적이 주룰 이룬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당일 돌발적으로 일어난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진행된 행사와 후반부 노 대통령이 각부 장관에게 부족한 복지정책에 대한 전문적인 사항을 지시하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의 선입견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우연하게 내 방의 책꽂이를 정리하다가 먼지가 묻어나는 점자 책자 하나를 꺼내게 되었다.

참여정부 복지정책과 장차법에 대해 소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점자 자료는 바로 2년전 청와대 영빈관에서 내가 받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20여일 전에 있었던 믿기지 않는 사건과 그 날의 청와대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 경호원에 의해 행사장 밖으로 끌려간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슨 무슨 차별 연대 소속의 휠체어 장애인들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 그들은 당일 저녁 메인 뉴스에서 어처구니없고 질서와 권위도 사라진 청와대의 상황이라는 비아냥섞인 기사 제목들로 뒤덮여 전파를 탔다.

장차법 통과가 장애인들에게 얼마나 획기적인 사건이며, 참여정부의 복지정책이 얼마나 성장한지는 그 해프닝에 가려 퇴색된 지 오래였다.

오히려 매스컴은 그것을 즐기는 것 같았고, 혹시라도 내 얼굴이 나오지나 않나고 TV 앞에 앉았던 가족들은 씁쓸함만을 지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것 뿐이었다.

당시 말썽을 피운 무슨 연대 장애인들이 그날의 무책임한 시위로 감옥에 갔다든지, 좌파 빨갱이 집단의 소행이니 철저하게 배후를 따져보겠다는 소리는 그 이후에도 도통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행사 당일 받아 든 책자를 몇 장 넘겨보았다.

그 때는 각 부 장관들이 치적이라며 내세운 정책과 성장 자료가 내심 초라하게만 보였었다.

5년 내 그토록 강조하던 민주주의의 성장과 복지를 통한 성장 모두가 가능하다고 외치며 정리한 자료가 이 정도밖에 안되었나 하는 아쉬움도 많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오늘을 생각해 본다.

2009년 6월 청와대의 대통령 면전에서  플래카드를 휘두르며 시위하는 차별 연대 소속 장애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나 또 하나의 전철연이라는 죄명으로 차디 찬 그 어딘가에서 배부른 이들의 만용으로 취급되며 쓸쓸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는 않을까?

종부세 폐지, 각종 재벌의 규제 철폐, 의료보험 개방, 학교간 성적 공개와 특목과와 자사고 설립 등의 휘몰아치는 정책폭탄들 속에서 복지의 성장 흔적을 2년전과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는 그냥 손에 든 책을 휴지통에 던져 넣었다.


청와대 행사가 끝나고 노 대통령은 참석자들과 함께 영빈관 앞에서 단체 사진 촬영을 했다.

  그리고 내 가까운 곳에 노 대통령이 함께 서게 되었는데, 내 키보다 낮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목소리를 들으며 처음으로 그 분의 키를 느낄 수 있었다.

돌아올 때 참석자 모두에게는 노무현과 봉황 문향이 새겨진 평범한 손목시계가 기념품으로 지급되었는데, 나는 그 날부터 줄곧 직장이나 명절 때 친지들과의 자리에서 그 때의 시계를 내 개인의 가보로 삼고 있다는 말을 농담삼아 자주 하곤 했다.

그 때마다 당시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핀잔을 주곤 했는데, 그 때의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한 미약한 존재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잘 짜여진 계획과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 좌절을 경험하며 시간과 함께 흘러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오늘 살아갈 가치를 새삼 깨닫는 것은 '고'민이라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래에 대한 고민, 더 나은 삶에 대한 몸부림치는 고민은 설사 그것이 좋은 결과로 맺어지지 못하더라도 그 자신을 깨우는 소중한 명약이다.

고민을 모르는 삶은 마약과 같이 자신의 눈과 귀, 생각을 가린 채 이 순간을 영원이라 여기며 자칫 오만과 방종속에 안주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참함 뿐이다.

내가 바라보는 인간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의 삶은 실팼을지 모르지만 미래를 위해 한없이 고민하려 했던 이로 남겨져 있다.


오늘 서울시 공정택 교육감의 대법원 상고 소식을 들었다.

우리들에게도 이 순간 강남 아줌마들과 같은 단순하면서도 상식적인 일사분란함으로 미래를 위해 고민하는 위정자를 뽑을 수 있는 기회가 어서 오기를 기원하며..

  

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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