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98년 89등대 계모임 수안보 여행기 [4]
보낸이:문성준 (tosoony ) 1998-02-23 23:18 조회:12
아래의 내용은 지난 98년 1월 1일 89학번 등대 계모임을 수안보로 2박3일간
다녀온 후기를 적은 글입니다.
수안보 수난기
지난밤 가족끼리 작은 송년회를 가지고 늦으막히
잠을 청한 탓에 조금 늦게서야 일어났다.
새해 첫날부터 서설이 내렸다며 모두들 창밖을 바라보며
좋아하건만 여행을 떠나기로 되어있는 나와 집사람의 마음은 웬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새해 첫 미사를 근처 성당에서 드린 후, 서둘러 짐을 꾸려 차에 올랐다.
따라오려는 지영이에게는 '아빠 술마시러 가는데 너도 갈래?'
했더니 금새 되돌아가 할머니 품에 안긴다.
(음, 누군지 교육을 참 잘 시켰어)
다행히 날이 그리 춥지 않은 탓에 길가의 눈들은 서둘러 녹기 시작했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넘긴 탓에 길가 제과점에서 사온 모닝빵을
곁에서 운전하는 집사람입에 정조준해 넣어주며 1차 모임장소인 아차산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동기인 임종혁(boyso) 내외와 부산에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 합류
한 여자친구 1명, 그래서 총 5명 만땅을 만들어 출발한 것이 오후 1시 30분..
한가하기만 하던 서울시내가 천호대교에 가까와오자 갑자기 불어난 차량으로 인해
홍수를 이루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서둘러 교통방송을 들어보니 중부와 경부 고속도로의 하행선 정체가 점차
심해진다는 것.
이럴수가..! 이건 완전히 장난이 아니었다.
빽빽하게 들어선 차량의 홍수는 완벽한 주차장 그 자체였다.
중 대형 차부터 티코까지 모두들 머리위에 스키장구들을 걸쳐놓은 차들이 주를 이루
는 게 분명 신정을 지내는 차들은 아님이 분명했다.
우리는 이 imf시대에 웬 스키냐며, 투덜댔지만 하긴 뭐 우리도 이런 때 아자씨
아줌씨처럼 수안보 온천이나 가니 뭐 남탓 할 일은 아니리라.
끝없는 정체의 연속아래 만남의 광장에 다다른 시간이 오후 4시. 평소 길어야 20분
이면 다다를 곳을 무려 2시간 반을 걸려서 도착한 것이다.
모두 점심을 거른 탓에 허겁지겁 근처 국밥집으로 달려가 앉을 자리를 확보하려는
치열한 경쟁을 벌여가며 바쁘게 맛없는 늦은 점심을 해치웠다.
다시 4시 30분경에 도로로 들어섰지만 상황은 여전히 안좋았다.
그동안 우리는 차속에서 준비해 온 젓가락 뽑기도 하고, 길가에 줄지어 선
오징어며 뻥튀기를 먹어가며 시간을 보내야했다.
5시까지 수안보에 도착하기로 한 약속은 이미 포기한 셈이었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저녁 7시가 넘어서자 고속도로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고 운전은 더욱 힘들어만 갔다.
예정대로 일죽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왔을 때에는 완전히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연휴의 한적한 시골저녁, 그것도 좁은 지방도로에는 가로등도 거의 없고 인적도
찾을 수가 없는 완전한 고립 그 자체였다.
겨우 찾아낸 일죽 휴게소에 주차를 한 때가 오후 8시반.
식사를 하러 들어선 한식점에는 문을 닫으려는지 청소를 하고 있었고 사정하며
주문을 하려하니 주인 아줌마의 말,
'시간이 늦어서 국밥 밖에는 안되겠는데요!'
으악! 또 국밥!
그나마 우리 뒤로 들어서는 손님을 주인 아줌마가 쫓아내는 걸 보며 우리는
울며 겨자먹기로 또다시 국밥을 먹어야했다.
'내 다시 국밥을 먹는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저녁 9시가 되어 밖으로 나오니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
급격히 떨어지는 기온으로 인해 녹았던 길가의 눈이 다시 얼어붙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 아줌마의 말로는, 여기서 수안보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는데..
제 시간에라도 갈 수 있을지 정말 의문시되었다.
갈수록 짙어지는 안개를 헤치며 다시금 거북이 걸음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 우리 차에는 안개등이 없는 탓에 더욱 시야는 좁아져서 채 1, 2미터 전방도
온전하게 안보인다며 집사람은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적막한 지방도로 위. 이미 핸드폰은 불통이된 뒤였다.
맞은편에서 오는 차의 불빛도 아주 가까이와서야 겨우 아른아른 보일 정도였고
그때마다 우리는 외마디 신음을 토하며 차를 정지시켜야 했다.
어쩌다 나타나는 길가의 사람의 윤곽은 오히려 우리에게 더욱 공포를 안겨주었다.
장호원을 지나 충주 방면으로 느릿느릿 차를 몰아가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뒷자리의 여자친구가, '저기 차가 뒤집어 진 거 아냐?'
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짙은 안개의 바다속에서 친구가 가리키는 곳에는 정말로 아토스 한대가 길가
개울창에 뒤집어져 있었다.
그와 함께 눈앞에 갑자기 다가온 것은 엄청난 경사의 언덕길.
급정거를 하고 내려서 보니 아 이럴수가!
온 바닥이 미끌거리는 완전한 얼음의 천지였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곳에서 우리는 도로가 완전히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있다는 것도
모른채 안개만을 의식하며 달려왔던 것이다.
만약 ㅜ리가 뒤집어진 차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들처럼 언덕을 올라갔다면...
눈앞이 아찔했다.
다행히 사람은 다치지 않았는 듯 두 사람이 차에서 나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서둘러 체인을 꺼내왔다.
이미 얼음으로 되어버린 길에 체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추위도 잊은 채 손이 시커멓게 되는 줄도 모르고 처음 달아보는 체인과 씨름을 하며
그렇게 하여 체인을 달았다.
그제서야 뒤에서 경찰차와 레커차가 나타나고 있었다.
그때 집사람이 그들에게서 들은 말,
'이리로 가면 서울가는 길인데요...'
쿵!
우리는 완전히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어디서 길을 잘못 들은 거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것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언젠가 통신에서 받은 '고양이 여인숙'이라는 소설이 현실로 나타난 듯했다.
수안보고 여행이고 뭐고 이젠 완전히 실의에 빠져버렸다.
시간은 이미 11시 반..
차를 돌려 나오는 길 좌우에는 렉커차들이 즐비하게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들처럼 야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말로는 이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런 상황에서 수안보에 가기는 불가능
하다며 충주로 가서 여관에서 자고 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충주시내로 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는 길에 여관이 나타나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 동네는 왜이리 썰렁하기만 한지, 진짜 고양이 여인숙의 배경과
비슷한 것만 같았다.
(필독 요망: 고양이 여인숙)
그때 눈앞에 나타난 '여 관'이라는 간판..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리로 차를 몰았다.
충주시 외곽에 있는 탓에 지저분하고 웬지 으스스해보이기까지 했지만 우리는
만약 방이 없다면 하는 걱정만이 가득할 따름이었다.
충청도에 걸맞지 않게 경상도 사투리를 스는 주인 아줌마는 남은 방하나를
4만 5천원은 최소한 받아야 줄 수 있단다.
이런 x같은 데가 있나...
이런 말이 목구멍에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우리는 원하는대로 다 들어주고
방을 들어서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건 완전히 여행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대역정이었다.
그때가 밤 11시 50분이었다.
장장 10시간이 넘는 여행길, 그것도 목적지에도 닿지 못한 최장의 여행길이었다.
수안보 친구들이 모인 곳에 전화하여 사정을 알리니,
서울맹의 이선생(inhak)와 김범석(bumdol)은 우리말을 장난으로 알고 믿지를 않는다.
'장난하지 말고 빨리 들어와. 안 잘테니까.'
내 참. 남의 사정도 모르고서리.
결국 그날밤은 수안보와 충주 외곽에서 그렇게 둘로 나뉜 계모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토순이의 세상 견문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짜 복권으로 제주도 여행 다녀온 사연 3 (0) | 2010.01.22 |
---|---|
공짜 복권으로 제주도 여행 다녀온 사연 2 (0) | 2010.01.19 |
공짜 복권으로 제주도 여행 다녀온 사연 1 (0) | 2010.01.18 |
문경새재에서 맞은 가을의 한 자락 (0) | 2008.10.28 |
수안보 생환기 2 (0) | 2005.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