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장애인에 대한 불편한 이야기

tosoony 2018. 12. 30. 14:14

  

초등학교 6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담임선생님이 갑자기 교실에 오시더니 남자아이들만 운동장에 나가 축구하고 오라 하신다. 졸지에 그것도 남자들끼리만 축구를 하고 놀아도 된다니. 너무도 반가운 말에 모두들 한 시간 내내 땀을 뻘뻘 흘리며 운동장을 뛰어다녔던 것 같다. 그런데 다음 시간에 교실에 들어와보니 여자아이들의 눈치가 이상했다. 무언가 자기들끼리만 소곤거리고 무엇을 했는지 도통 남자아이들에게는 말을 안해주는 탓에 한참을 머쓱해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그 때 여학생들끼리만의 소위 성교육이라는게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성교육을 남녀가 함께 받도록 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지만 당시에는 성교육이라는 게 여성들만의 2차 성징에 대한 안내와 함께 남자들의 본능과 속성을 거론하며 여자들은 그러한 남성의 본능을 자극하지 않도록 옷차림을 조심하고 위험한 자리는 피해야 한다는 게 주를 이루었다. 우리 부모님과 내 세대조차도 이러한 성편향적인 논리를 당연한 것인양 받아들이면서 세상을 살아왔고, 그러한 사고는 우리 사회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과 가치를 재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어 왔다.

1990년대 초 임용을 통해 교사로 부임할 당시 대부분의 학교 서류 업무는 종이를 기반으로 이루어졌고 그것은 나와 같은 시각장애 교사에게는 커다란 장벽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초임 교사인 내게 힘든 일과 중 하나는 출석부 기록이었다. 수업종이 울리면 교무실 출입문 앞 책꽂이에 반별로 끼워져있는 해당 반 출석부 바인더를 꺼내 교실무을 열고 들어가 호명을 한 후 결석한 녀석의 이름을 찾아 정확한 날짜와 시간에 따라 빽빽이 그어진 빈칸에 체크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일조차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체크하지 못한 출석부를 도로 들고 내려와 교무실에 남아있는 동료 선생님 자리를 찾아 미안한 얼굴로 매번 부탁을 해야 했는데 그것도 다음 수업이 연이어 있을 때면 처리하지 못하고 바쁘게 교실로 향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쌓이다 보니 일과 담당선생님으로부터 불평어린 소리를 자주 들었고, 심지어 교무회의에서는 공식적으로 시각장애 선생님들의 무능함에 문제를 제기하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나의 부족함이 학교에 피해를 준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다.

당시 가까운 선배 선생님께서는 이런 내게 조언을 해주시곤 했는데, "도움을 구할 때는 항상 커피 한잔이라도 빼들고 가서 선생님들한테 부탁하고, 평소 일을 할 때면 니가 장애가 있으니 남들보다 더 부지런히 그리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말을 강조하시곤 했다. 나 역시 평소 그러한 선배 선생님의 충고를 실천하려 애썼을 뿐 아니라 대학에 진학을 앞둔 제자 녀석들을 불러모아 대학생활의 팁을 소개하면서 어느새 똑같은 조언을 대물림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내 마음 속으로부터 작은 의문과 함께 불편함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지금의 이런 나의 상황은 과연 모두가 내 잘못이고, 내가 부족한 탓에서 기인한 것일까. 그리고 내가 더 노력해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고 그것이 잘못된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왜 비장애인들에 비해 더 부지런해야만 하는 것일까?'

 

시각의 장애가 그 사람의 능력으로 굳어지고 나아가 므능의 잣대로서 천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은 이 순간에도 사회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장애인의 사회 참여를 바라보는 프레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장애인을 위해 이 정도 국가가 나서서 해주는 것을 고마워해야 하지 않느냐라는 관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장애인이 소위 비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살 마음을 먹었다면 최소한 이 정도의 난관이나 불이익 정도는 알아서 극복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관점이라고 하겠다.

첫 번째는 장애인을 시혜적인 관점으로 국가나 주변에서 도움을 주어야 할 피동적인 존재로 보는 관점이라고 하겠다. 그러다 보니 이런 특혜를 받는 장애인들도 욕먹지 않게 더 모범적이고 부지런하게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잘못된 사고방식이 장애인을 옥죄곤 한다. 물론 장애인도 부지런해서 나쁠 게 없으며, 모범적인 생활을 한다면 주변에서 더욱 더 함께 할 마음을 먹지 않겠는가에는 나 역시 동의한다.

하지만 비장애인들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게으를 수도, 나태할 자유를 갖는 데 반해 장애인들은 항상 주변을 의식해 노심초사하며 한 발 더 노력해야만 하는 존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두 번째로 장애인을 불굴의 승리자로 몰아가는 우리 사회의 프레임의 문제를 들 수 있다. 한쪽 다리만으로 철인 삼종경기에서 자전거타기를 완주하는 장애인을 보며 눈물흘리는 방송은 뉴스가 되지만 정작 한쪽 다리만으로 탈 수 있는 자전거를 만들어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가 아닐까라는 내용을 지적하는 기사는 본 적이 없다. 시중에서 몇 천원이면 구입할 수 있는 참고서를 몇 달이 지나서야 점자로 받아볼 수 있는 시각장애인이 대학에 진학한 사실을 대서특필하지만 시각장애인이 원하는 자료를 동시간대에 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장애 극복'이라는 왜곡된 프레임속에 장애인을 가두고 멀찍이 떨어져서 장애인 본인의 처절한 몸부림만을 강요한다.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 프레임은 결코 장애인을 온전히 바라보는 프레임이 아니며, 그러한 가치 속에서 장애인은 여전히 덤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강타한 이슈 가운데 미투 캠페인만큼 큰 반향을 일으킨 사안이 또 있을까. 미투 캐페인이란 사회관계망서비스에 성범죄 피해 사실을 밝히며 심각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뜻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모 여검사의 방송 폭로가 기폭제가 되었다고 할 수있다. 당시 성추행을 당한 검사가 겪어야했던 가장 큰 고통은 모든 일이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라는 자책과 피해의식이었다고 한다. 앞에서 전근대적인 성관념을 물려받은 여성들도 '여자들이란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성폭력을 당한건 내 옷차림이 야해서일 거야'라는 의식을 암암리에 강요받아왔다.

그러한 여성들에게 올 한해 미투와 탈코르셋 운동은 과거의 잘못된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신의 합당한 평등적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장애인의 재활과 바람직한 사회 참여를 위해 장애인 본인의 재활 의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점은 틀림없다. 또 사회 참여에 필요한 전문적 능력도 소중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가진 장애를 이유로 불평등한 차별과 수고로움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게 하지 않도록 하는 시스템을갖춘 사회야말로 진정 건강한 사회가 아닐까.

 

한 해가 끝나가는 이즈음, 새밑 한파가 옷깃을 여미게 한다. 2019년 새해에는 모든 고통받는 이의 눈물을 씻어주고 행복이 함께 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Isn't she lovely  (0) 2021.04.10
페닉  (0) 2020.08.28
제대로 배워야  (0) 2017.10.15
벌거벗은 임금님  (0) 2015.06.22
데자뷰  (0) 2015.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