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스케치

아빠의 특별한 컴퓨터

tosoony 2014. 7. 30. 01:44

시간을 앞서 때 아니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학기말 업무와 외부 전시행사 준비에 야근을 하던 지난 6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지겹도록 컴퓨터 앞에서 일하고 퇴근했건만 씯고 나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또 다시 방안의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것입니다.

그것은 컴퓨터가 업무용 워드프로세서 기계 차원이 아닌 내 삶의 눈이요, 여가선용 도구요, 휴식의 대상이자 신문이요, 책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그 날은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가끔 집안 청소를하는 가족이 전원코드를 잡아당겨 코드가 뽑아지는 일이 있기에 별 생각없이 여기저기 둘러 보았습니다만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더군요.

"어라, 이것 봐라.."

한동안 이런 저런 실랑이를 하던 끝에 내린 결론은 파워 서플라이가 나간 것 같다는 것.

그러고 보니 2년여간 아무런 속도 썩이지 않은 게 슬슬 병원을 드나들 때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수리 과정이었습니다.

대전 시내 전자랜드 단골 가게로부터 조립용 제품으로 21년째 컴을 사용해 온 탓에 as 방문을 기대할 수도 없고 결국은 누군가 안고 가야 하는데 이 바쁜 시기에 그런 일을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문득 예전에 이용하던 심부름센터 차량이 떠올랐습니다.

이곳에서는 시각장애인 심부름센터에서 회원의 요청이 있을 경우 본인이 탑승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꼭 필요한 물품을 다른 곳에서부터 회원이 있는 곳으로 옮겨주는 서비스가 가능합니다.

오래 전에도 물건을 몇 차례 배달시킨 경험이 있던 터라 다음 날 약속 시간을 정한 후 낮에 활동보조인을 집에 대기시키고 도착한 심부름센터에 컴퓨터 본체를 실어 보내게 했습니다.

물론 컴퓨터 가게에도 전화를 걸어 차량이 도착할 즈음 아래로 내려와 물건을 받아가도록 했죠.

점검을 마친 사장은 잠시 후 일하는 제게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컴퓨터가 아무 이상이 없이 잘 켜진다는 것.

"그럴 리가 없는데요.. "

가게 주인이 한 일이라고는 습관적으로 본체를 열어 수북이 쌓인 먼지를 털어낸 것밖에 없다나요.

제 불찰이었씁니다. 본체를 열어두고 먼지를 털어봤어야 했는데 여러 일에 정신없다 보니 차분함이 사라지고 조급함만 앞선 것이었습니다.

결국 멋쩍게 웃으며 같은 방법으로 다음 날 되돌려 받기로 하고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심부른센터 차량 예약도 순조롭게 되었고 앞서와 반대의 순서로 차량에 본체를 실어 집에서 대기하는 활동보조인에게 건네지도록 약속 시간 조정을 해두었습니다.

아무리 늦어도 11시 정도면 집에 도착했을 시간이었는데요. 정해진 시간이 넘어 업체 사장에게서 어이없어하는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제 컴퓨터를 잃어버렸다는 것.

이야기인 즉, 마침 그날 사장이 세종시 쪽에 납품이 있어 젊은 알바 직원에게 전달 일을 맡겼는데, 지하 주차장에 주차된 심부름센터 문구가 달린 승합차 대신 실수로 근처에 세워둔 카니발 차량에 다가가 문을 열고 본체를 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희한한 건 문을 열고 차량에 물건을 실으면서 운전자에게 물건을 싣는 데 동의를 구했는데 그 사람도 무심히 그러라고 하더니잠시 후 유유히 차를 몰아 지하 주차장을 빠져 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짜증섞인 심부름센터 차량 운전자의 전화를 받고서야 일이 잘못된 걸 알았지만 알바 직원은 문제의 차량이 카니발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화기 너머 사장의 말을 들으며 아무리 그래도 설마~~, 주변에 본 사람이나 cctv, 블랙박스도 널려 있는데 헤프닝처럼 곧 돌아오겠지라는 생각에 사장의 열심히 찾아보겠다는 말에 고생많다는 말까지 하며 웃어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 저녁 다시 걸려 온 전화에서도 아무 소득이 없다는 이야기만을 들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문제의 심각성을 안 사장은 가게문을 닫고 전자랜드 건물 전체 매장을 일일이 드나들며 문제의 차량으로부터 기계 납품을 받기로 한 적이 있는지,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본체를 들고 오면 연락해 달라고 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112에 신고를 하였고 파출소에서 매장을 둘러보고 접수를 해가기도 했습니다.

전자랜드에도 지하 주차장과 정문 등에 여러 개의 cctv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오래전 설치된 제품들이라 화면이 흐리거나 사각지대에 끼어 제대로 번호판을 알아보기 어려웠고, 당시 주변에 주차된 차량들의 블랙박스도 모두 조사했지만 모두가 주차 상태에서는 동작하지 않거나 하루만 지나면 자동 삭제되는 상태로 이미 손 쓸 방도가 없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어리버리한 문제의 알바 직원은 초기에 차량이 사라진 방향이나 위치 등에서도 엉뚱한 정보를 알려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만드는 등 악재가 겹치기까지 했습니다.

 

그 사이 제 신상엔 엄청난 변화가 찾아 왔습니다.

1989년부터 한 번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던 컴퓨터가 지금 옆에 없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공황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집안에는 외부에서 사용하려고 구입한 노트북도 있고, 아이가 쓰는 컴퓨터도 있었기에 간단한 인터넷이나 워드 업무는 유지될 수 있었고 ndrive 속 보관된 자료와 학교에서도 제 개인 업무용 pc속에는 최근 몇 년간 사용한 업무 문서들이 있었기에 그럭저럭 일은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0여년간 컴퓨터 자료를 관리해오며 1테라 이상의 하드 디스크를 여러 개 달고 주기적으로 폴더 정리와 자료 백업을 해온 컴퓨터는 단순한 쇳덩어리가 아니라 제 존재 그 자체였습니다.

1989년 대학교 1학년 xt 컴퓨터를 처음 구입하고 1993년 직장에 들어서면서 2, 3년에 한 번씩 컴퓨터를 바꾸었지만 한 번도 데이터 손실 사고는 없었습니다.

지금은 쓸 수도 없는 ms-dos 시절 유틸리티들, 제가 작업한 문서나 보고서, 계획안 등 수 백편의 정식 자료는 물론 오랫동안 pc통신과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던 글들과 기고문, 2000년대 초 디카가 보급되면서 찍어온 수 천여 장의 가족의 사진과 아이들의 성장 동영상, lp판 시대에서 cd, mp3으로 넘어오면서 직접 추출하거나 다운받아 분류별로 보관해 온 수천여 장 분량의 흔하지 않은 음악들, 종이책으로 변환하면 웬만한 도서관 한 켠을 모두 메우고도 모자랄 것 같은 텍스트 도서 파일, 대학원 과정에서 귀하게 자원봉사나 유료로 소장한 학술 문서, 개인적인 일기와 10년간의 아웃룩 받은메일함, 스캔을 떠 보관해 온 집안의 여러 중요 신분증 사진 파일들, 그밖에 기억하지도 못하지만 제 일에 도움을 얻으려고 그 때 그 때 작성하다가 저장해 둔 수많은 디지털화된 기억들의 흔적이 한 순간에 사라졌다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부터 매일 퇴근하고서 제가 한 일이라고는 멍하니 보지도 않던 tv 쳐다보기, 쇼파에 누워 선잠에 빠져 늦은 시간까지 허비하기, 괜한 야식이나 탐하거나 아이폰을 뒤적이며 가십 기사나 대중 소설을 익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 현실이 전혀 믿어지지 않았고 수시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심지어 하는님께서 드라마같은 이 상황을 나한테 일어나게 한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은가라는 생각에 기도 속에서 답을 찾으려 끙끙거리기까지 했습니다만 하루 하루 안개같은 멍한 시간만 지나갈 뿐이었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같은 달 학교 자체 서버의 고장으로 제가 2000년부터 공들여 운영한 바 있는 홈페이지가 날라가 크게 손상을 입은 것도 영향이 있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지 보름이 지나고부터는 저는 업체 사장에게도 연락을 끊었고 대책없이 하루 하루 직장 일을 마친 다음 가정에 돌아와서도 가족에게 시간을 할애하기보다 넋나간 사람처럼 말없이 시간을 보내는 데 익숙해져 갔습니다.

그러던 중 경찰 생활을 하는 한 지인의 가족에게 의견을 구한결과 단순히 112가 아니라 정식으로 경찰서에 절도로 사건 접수를 해야 그나마 성의있게 알아봐 준다는 말을 득고 사장을 통해 경찰에 절도 신고를 하도록 했습니다.

물론 그 지인은 그렇게 신고 접수를 통해 수사를 해도 물건이 돌아올 확률은 채 10%도 안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당부도 해주었지요.

이후 사장은 경찰서 출두와 주변 탐문을 하느라 가게 문을 수시로 닫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것은 20년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이기에 제게 있어 컴퓨터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던 20여일이 지난 어느 날 사장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경찰서에서 그 지역 주변에 우리가알지 못하는 범죄 방지용 cctv들을 정식으로 조회하고 있다는 것과 며칠 지나면 결과가 나올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전 그 말에도 크게 기운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본체를 들고 사라진 지 한 달 가까이 지나간 상태로 물건이 분해되도 수 십번 분해될 수 있는 시간이 지나갔고 설사 당사자를 찾는다 한들 기계가 한 달간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을지 만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다시 사장으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경찰서에서 문제의 차량 번호 4자리를 식별했다는 것, 동종 차량의 동일한 번호를 쓰는 차적을 조회하고 있다는 것이었죠.

반신반의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사건이 발생한 지 딱 28일이 되는 날 저녁, 마침내 문제의 차량 소유주와 통화가 되었다는 사장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전해진 순간 저는 대전 모 호텔에서 세미나 행사에 참가한 중이었습니다.

제가 지른 외마디 탄성에 주변 선생님들 모두가 깜짝 놀랐지요.

그렇지만 그 순간만큼은 더 심한 짓(?)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사장의 말에 의하면 제 컴을 싣고 간 장본인은 주인을 찾아 돌려줄 방법이 없어 그동안 집안에 방치해 두고서 일을 하러 돌아다녔다고 했고 사장은 그 일이 절도 행위와 마찬가지고 그로 인해 자신이 입은 피해를 변상시키겠다며 엄청나게 벼르더군요.

그리고 이틀 후 저녁, 마침내 꿈같이 컴퓨터가 제 방안에 돌아왔습니다.

물론 이동의 충격으로 일부 슬롯이 들떠 있기는 했지만 모든 데이터들은 멀쩡한 상태 그대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 저는 새로 구입한 외장 하드를 연결해 제 데이터들을 백업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 달간의 일이 미니시리즈 드라마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몰래 카메라의 주인공으로 놀림감이 되었다 구출된 것도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내게 있어 아니 시각장애인에게 있어 컴퓨터는 과연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또 과연 나는 아나로그적 삶과 내 주변 가족 이웃에 대해 최선을 다해왔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었나 반성해 보게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 가족신문에 쓴 구절이 떠오릅니다.

 

아빠

성격: 약간 불같은 면이 있고, 백화점 쇼핑 때에는 되게 짜다.

요점을 말하지 않으면 성에차지 않아, 열변을 기본적으로 무려 30분 이상을 토하거나, 심각한 얼굴로 컴퓨터 앞에 1시간동안 앉아 있는다. (중략)

 

5학년 딸의 눈에는 컴퓨터 스크린리더 목소리에 심취해 있는 제 모습이 심각하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낯선 아빠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 남은 삶을 재미없는 아빠가 아니라 재미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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