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내 아이의 사춘기

tosoony 2009. 4. 6. 00:17

어느새 4월이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감에 세상을 올려다보는 눈이 바뀌어감을 새삼 실감한다.

병원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더욱 건강해진다는 말보다는 나이가 드니 그런 것이라는 위안 아닌 위안을 듣고 나오는 때가 많아졌다.

세상은 발전한다고 했더만...

 어이없는 일들과 뒷걸음질이 반복되고 힘없고 소외된 이들이 더욱 산업화의 그림자속에 짓눌리는 오늘을 대하며 암울한 좌절감에 자주 빠져들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한가닥 희망은 내 자식이 커가는 모습이 아닐까.

가슴 안에 한손으로 안아도 손에 여유가 남던 보잘것 없던 녀석들.

늦은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는 큰 딸아이를 깨우기 위해 올라앉은 침대맡에서 녀석을 어루만지며 나도 모르게 낯설은 느낌에 주춤한다.

이게 내 자식이 맞던가?


중학교 2학년이라는 사춘기의 한 복판에 있는 딸아이가 요즘 우리 부부를 참 힘들게 한다.

당연히 때가 되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여유만만하게 대비했건만 현실은 이론과 전혀 다른 법을 새삼 실감한다.

감정의 기복이 하루에도 열 두번씩 일어나고, 작은 말꼬리에도 입이 한자락이 나온다.

혼도 내보고, 협박도 해보고 달래기도 하면서 살얼음을 밟는 기분으로 녀석이 우리 부모의 둥지 안에서 푸근하게 자라기를 기대하건만 왜이리 진땀이 나는건지...

그런 녀석이 요즘 들어 드디어 '연예인'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작년까지 우리 부부는 내 딸아이가 좀 다르다는 얘기를 하며 그 이유 중 하나로 연예인에 대한 집착이 없다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었다.

연예인에 대한 관심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 나이 또래 겪어야 할 수순을 밟는다는 것은 나름의 평범한 성장을 따른다는 점에서 자못 기다렸건만 녀석은 작년까지만 해도 대중가수나 텔런트에 시큰둥하기만 했었다.

심지어 새로 사준 mp3에 엄마 아빠가 차에서 듣는 70, 80 노래를 담아 듣는 복고풍의(?) 행동을 하는 녀석이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그러던 녀석이 어떻게 알았는지 어느 날부터 '서태지'에 푹 빠져들었다.


90년대 초, 발라드와 전통 롹에만 심취해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과도 같은 음악을 선사하며 돌풍을 일으킨 '서태지'.

그 '서태지'의 팬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카셋트 테이프가 닳도록 '난 알아요'를 들었고, 나중에는 lp판으로 다시 구입해서 녹음테이프로 복사를 한 후 모든 곡을 반복해서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 2009년의 내 아이가 그 '서태지'의 연혁과 스케줄, 방송 출연일을 꾀기 시작하더니 온 방에 브로마이드를 붙이기 시작했다.

식탁에서 식사할 때면 녀석은 엄마 아빠 앞에서 '서태지'의 근황과 음악성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고 싶어했고, 서울에서 열린 값비싼 콘서트를 가지 못한 것에 하루종일 한숨으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내 아이의 뒤늦은 사춘기의 작은 변화가 반갑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그래도 내색을하지 않고 조금씩 맞장구도 쳐주고 귀담아 듣는 척을 하니 아이는 내가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서태지'의 새 앨범 발매 소식을 떠들어댄다.

'지영아, 그래도 공부할 때는 모든 걸 잊고 공부에만 몰입해야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녀석이 내 방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펄쩍 펄쩍 뛰기 시작했다.

그런 녀석의 손에는 먼지가 쌓인 오래된 lp판 한 장이 들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1992년 내가 구입해 닳도록 들었던 '서태지' 1집 앨범이었다.

녀석은 우연히 내 방 한켠에 버리지 못하고 책장에 꽂아둔 200여장의 lp판들 사이에서 '서태지'라는 노다지(?)를 캐낸 것이었다.

'아빠도 서태지 팬이었구나! 그치! 그치!!'


그 날부터 우리 부녀에게는 특별한 공감대가 생겼다.

아이는 으레 당연한 듯 내게 '서태지'의 최신 출시 앨범의 특징과 뒷얘기들을 늘어놓곤 하고, 난 그저 모든 내용에 동조하며 무슨 말인지도 모른 체 맞장구를 쳐주고 있다.

tv 인기가수 프로에서 '서태지' 코너가 나올 때면 긴장한 모습으로 오 집안을 조용하게 만들어 놓고는 나를 이끌어 옆에 앉히고 음악감상에 몰입하기까지 한다.

녀석에게 요즘 '서태지' 노래는 별로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녀석의 충격어린 모습을 대할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꼭 하나 참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아이의 눈높이에서 모든 걸 봐주고 싶지만 재주가 부족한 이 아빠가 유일하게 잡은 소통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요즘 집에서 내가 하는 작업이 하나 있다.

20년이 다 된 앰프와 고장난 턴테이블을 꺼내서 수리하는 것.

녀석은 꼭 '서태지' 노래를 이 고물 앰프와 턴테이블로 들어야하겠다니 어쩌겠는가..

그리고 잠시 생각해 본다.

어쩌면 앞으로 20년 뒤 녀석의 딸아이가 엄마의 오래된 책장속에서 꺼낸 '서태지' cd들을 보며 신기한 듯 물어볼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