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종전 집착과 건국 강박
오랫 동안 소식이 끊겼던 명사의 지인을 찾는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인간의 기억만큼 부실한 것도 없다. 애타게 찾는 사람에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추억이 정작 상대의 머릿속에서는 깨끗하게 지워진 경우가 왕왕 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중국 관중이 우리 양궁 선수가 활을 쏠 때마다 호각을 불거나 소리를 질러 한국 팬을 화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서울올림픽 때 한국 관중도 중국 팬을 많이 열받게 했다. 중국 관중처럼 유치하지는 않았으나 열화와 같은 응원으로 천하에 적수가 없었던 중국 남자 탁구를 무너뜨리는 데 힘을 보탰다. 편파 판정 시비도 적지 않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스포츠에서의 ‘기억상실’은 얼마든지 애교로 넘어갈 수도 있지만 역사의 진실에 대한 혼돈은 심각한 갈등을 초래한다. 일본 언론은 1945년 8월15일을 패전일이라 하지 않고 악착같이 종전일이라고 부른다. 그러고는 이맘때쯤 되면 마치 일본이 피해자라도 되는 양 전쟁 당시의 궁핍, 공습 공포, 혈육을 잃은 슬픔 등에 대한 특집 기사를 쏟아낸다.
일본의 논픽션 작가 다무라 시즈에 씨가 일본 식민지였던 타이완의 중학교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타이완인과 일본인 동급생을 수십년 지난 뒤 인터뷰했는데 결과는 매우 흥미로웠다.
타이완인은 일본인 선생과 경찰에게 당했던 쓰라린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데 반해 일본인은 장난기가 가득했던 학창 시절의 소소한 에피소드만 기억할 뿐이었다. 아마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학교를 다녔던 일본인을 추적해봐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불편한 진실을 봉인하려는 심리는 용어에 대한 과민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일본 언론이 주변 피해국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종전이라는 단어에 집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끔찍한 증언이 산처럼 쌓였는데도 일본인 가운데는 난징 대학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하는 이가 많다. 당사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았는데도 일본 우익은 종군위안부를 단순 매춘부라고 불러야 한다고 우긴다.
각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광복절날 ‘건국 60주년 행사’를 ‘기어코’ 치르고 말았다. 이 행사를 주도한 뉴라이트와 보수 단체의 주장을 들어보면 그들은 ‘건국’이라는 단어에 항일과 민주화를 매장해버리고 싶어한다. 종전이라는 쿨한 용어로 전쟁범죄를 가리려고 하는 일본의 행태를 닮았다. 용어에 대한 강박관념만 본다면 그들은 영락없는 식민통치와 독재의 가해자다.
- 시사IN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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