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에서 우리민족에게 최대비극은 분단과 전쟁이었다.
분단과 전쟁의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면 싫어도 일제강점기로 가야한다.
기미년 만세운동이후 국내의 독립운동기반은 작살이 난다.
그래서 무장투쟁이 자연스런 흐름으로 잡히고
만주일대는 그 본거지가 된다.
이 때 하와이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정객하나는 외교해방론을 떠들고 다닌다.
강대국에게 우리나라의 현실을 알려 독립을 보장받으면 자연 해방으로 갈 수 있다는 요지였다.
이 정객은 어찌된 일인지 미군과 함께 귀국하여
독립운동의 상징으로까지 명성이 자자해진다.
결국 역사는 우리민족의 허리를 잘라버렸고 서로의 가슴에 총질까지 하는 비극으로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그 잔흔을 찾는것은 너무나 가까이 뚜렷이 남아있다.
21세기들어 역사는 다시 용틀임을 하며 노정객을 되살리고있는 중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것일까?
답은 우리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답은 우리 민족이 우리민족해방에 어떠한 역활도 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임시설정한 38선이 분단선이 되는 꼴을 지켜보아야했고
급기야 그 지점에 철책을 둘러싸고 갈라져 살고있다.
분단의 책임을 두고 여러가지 학설이 많이 있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외세에 의한 분단책임론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일정비판이 가해진다.
외세분단론을 받아들이면 우리민족이 우리민족의 의사결정에 아무것도 하지못한
무기력증을 노정하게된다는 주장이었다.
그 결과는 현재의 모든 현상에 대하여 국내의 누구도 책임이 없다는 지점에 이르게되며
강한 외세에는 질 수 밖에 없다는 패배주의만 남는다는 비판이 가해진다.
이는 다시 강한 놈에게 들러붙는것이 처세법이란 아주 우울한 사조가 되어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발전한다.
더 적나라하게는 그 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라는` 한 마디로 모든것을
역사에 맡기자는 아주 우울한 결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켜야하는 논리가 된다.
그 때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사람은 모두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갇 되며
국내에서 일본경찰앞잡이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공산당때려잡는 반공투사가 됨으로 면죄부를 받는
희안한 현상을 만든다.
왜 다 아는 이야기를 이리 지루하게 오래할까?
현재 시각장애인의 삶과 일제치하의 조선민중의 삶은 너무나 똑같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도 산관없다는 주장과
우리만 이짓하는 거 아니라는 주장은 정말 똑같다.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진정 해야할 일은 어찌 살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안마를 하더라도 안마를 해야한다.
앞의 안마는 업종으로서의 안마이고 뒤의 안마는 시술행위로서의 안마이다.
안마를 하는 데 왜 아가씨가 치마후크를 풀러야하는지
안마에 왜 임신방지기구가 비치되어야하는지
안마에 24시간 영업은 무슨 의미인지 답해야한다.
안마가 안마사들의 손에 독점적으로 쥐어진다하여
과연 얼마나 버틸수 있을까?
과연 단속하지 말아달라는 집회가 생존권투쟁이라 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서 이런 주장에 지지를 얻어낼수 있을까?
근본으로 돌아가야한다.
안마는 과연 얼마의 경제가치를 가진 의료행위인지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야한다.
안마의 치료적 효과나 예방적 효과는 얼마나 존재하는지 입증하여야한다.
그것이 살아남는 길이다.
안마업권을 노리는 모든 세력을 모두 몰아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시술소앞에 경찰과 부녀자들로 합동조사단을 상주시킨다면 받아들일
자신이 있는가?
아니 안마시술소라고 찍힌 카드가 가정으로 배달되어도
그 집에서 부부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병원치료비가 찍힌 카드명세서로 싸우지 않는것처럼 말이다.
이 지점이 가야할 곳이다.
이 지점이 살 곳이다.
설사 지금보다 소득이 줄어도 그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다.
설사 지겹게 가난해진다하여도 신이
우리에게 주신 안마를 흡족히 바라보실 지점이 또한 그곳이다.
그 흡족함으로 축복을 해주실 지점또한 그곳이다.
나에게 주신 달란트로 정성들여 살아갈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내 손에 주신 달란트를 버리고 대체 누구의 달란트를 따라다니고 있는가?
만약 그래도 그럼에도 부족하다면 그것은 신이 야박한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신은 결코 야박하지 않다고들 한다.
그는 주실만큼만 주신다고한다.
자, 대체 무엇이 두려운가?
진정 두려워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할 때 축복도 가능하다.
우리가 끼지도 못한 채 맞이한 해방이
어떤 결과로 반세기를 지나 일세기를 향해가는지
직접 겪고 있지 않은가?
도둑처럼 오건 새벽에 오건
어찌 그를 맞이할것인가?
무엇으로 그를 영접할 것인가?
비단옷 아니면 고작 수돗물 한 그릇
어느것을 더 기뻐하실지 우린 따져야한다.
내가 믿는 신에게 다시 물어보고 그렇게 살아가면 될일이다.
그것이 그렇게도 아끼는 자식들을 위해서도 진정한 축복이 될지니
- 넓은마을에서 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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