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지하상가

tosoony 2021. 9. 24. 10:16

1993년 대전 임용고사에 합격한 후 친구에게 시내 구경을 부탁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서구의 신도심도 만들어지지 않은 터라 시내라고 해봐야 대흥동 인근의 지하상가와 동백이라고 불리는 조그마한 백화점이 전부였다.

서울이 고향인 탓에 새벽까지 길거리에 사람이 북적이던 것만 보아 오던 나는 저녁이면 인적이 끊어지는 대전 변두리 모습에 적응하지 못했었다.

그즈음 지하상가를 거니는 사람들과 호객 행위에 나서는 매장의 북적이는 모습은 나에게 고향의 향수를 달래게 했다.

그 때부터 우리 부부는 10여년 넘게 새 옷을 고르거나 물건을 장만할 때면 으레 지하상가를 찾곤 했다.

 

지난 추석 연휴 마지막 날, 복지관에서 받은 온누리 상품권을 써야 한다는 딸아이 말에 모처럼 지하상가를 찾았다.

재래시장과 함께 유독 지하상가 주변 일대 매장에서 온누리 상품권을 받아주었기 때문이었다.

3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하상가가 있는 곳은 구도심의 공동화가 심해지고 대부분의 상권이 서구와 유성구 등 신도심으로 옮겨가 있었다.

거기에 대형 홈플러스가 집앞에 생기고 모바일터치 한번이면 물건이 문앞에 도착하는 시대가 되면서 까맣게 잊혀졌건만 다시 찾은 지하상가는 여전한 듯 보였다.

딸아이는 뜻밖에 2, 3만원대에 질좋은 많은 옷을 고를 수있다는 점에 기뻐하며 여기저기 매장을 돌아다녔다.

 

아내에게 한마디했다.

"자기도 옷 좀 골라봐."

아내가 대꾸한다.

"여보, 이제 우리가 입을 만한 옷은 이 곳에 없어요."

맞는 말이었다.

27 나이 신혼에 즐겨 이용했던 지하상가.

어느새 내 딸의 나이가 27, 우리는 그 나이에 딱 두 배가 되는 나이가 되어 버린 지금,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딸아이는 연실 싼 가격에 옷들이 잘 나왔다고 좋아한다.

하지만 아이가 진짜 좋아한 것은 옷이 좋아서가 아니라 젊음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젊음은 모든 걸 눈부시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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