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요즘 생굴이 싱싱한 때라며 굴무침 반찬을 내놓는다.
싱싱한 굴에서만 느껴지는 달큰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버물여진 초고추장과 함께 겨울 내 움츠려든 입맛을 돋군다.
그런데 요놈의 생굴들이 납작하게 썰여져 같이 버무려진 무 사이로 요리 조리 피하면서 미끄러지기만하고 계속 내 젓가락에는 죄없는 무들만 집혀 입안으로 들어간다.
'왜 이리 무를 많이 썰어넣은겨~~;'
괜한 투정을 하며 진땀을 뺀다.
물론 여기에는 표준화된 방법을 습득하지 못한 내 젓가락 실력도 한 몫하고 있다는 것을 실토해야겠다.
실명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젓가락질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었다.
물론 가족과 주위 사람들로부터도 젓가락질의 결함에 대해 타박하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나름 정밀한 반찬을 재주껏 잘 집어 먹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 갈치는 지금처럼 비싸지도 않고 동네 시장에서 제법 쉽게 구할 수 있는 서민형 생선이었다.
2남 2녀의 나의 형제들은 갈치를 참으로 좋아했는데, 주요 살점은 물론 생선 등뼈에 붙은 미세한 살점 흔적마저 젓가락질의 신공을동원해 모두 훑어먹었다.
그 중에서도 나의 실력은 아주 출중한 재주로 인해 딴 형제들보다 몇 점이라도 더 많이 재빨리 먹을 수 있는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중학교 때 찾아든 실명은 이러한 나의 노하우를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시력이 있는 사람들은 식탁에 놓인 반찬의 크기와 길이, 형태적 특성을 모두 고려해 가장 적정한 무게 중심 부위를 두 개의 젓가락을 벌려 한번에 쥐어들게 되는데 그러한 필수적인 기술을 동원할 수 없다 보니 반찬 접시로부터 목적지인 내 입안까지 대략 45도의 각도를 그으며 끌어올려야 하는 작업 과정에서 잦은 추락과 이동 과정의 잔재를 식탁 위에 남기는(?) 당황스러운 경험을 번번히 느껴야 했다.
그제서야 가족들은 나의 평범치 못한 젓가락질에 주의를 집중했고, 틈나는 대로 모든 원인을 내 젓가락질 탓으로만 돌렸다.
이제라도 젓가락질을 새로 배우라는 둥, 딸아이보다도 못하면 되겠냐는 둥...
그러나 모든 것은 다 때가 있는 법, 40년 가까이 놀려 온 손가락 기술이 하루 아침에 바뀐다는 게 어디 그리 쉽겠는가.
별 것 아닌 기술임에도 젓가락질에 대한 콤플렉스는 가끔 나의 사회적 활동에서 작은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런 저런 중요한 행사나 윗 분들과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될 때면 괜히 식사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지고, 주눅이 들어 먹고 싶은 반찬에 대한 욕망(?)을 억누른 채 적당히 가까운 곳에 있는 반찬 몇 가지에게만 화풀이를 해대곤 한다.
딸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다른 식구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젓갈류나 바다회의 진정한 참맛(?)에 어려서부터 일찍 눈을 뜬 딸 아이는 아빠가 우럭, 광어, 낙지 젓갈 등의 음식을 먹을라치면 아빠보다도 더 반색을 하며 젓가락을 쥐고 달려온다.
'이거 아빠 술안주래두 그러네~~. 어린애가 이거 먹으면 머리 아프고 배도 아플 수 있어..'
아무리 과장에 거짓말을 해도 꿈적하지 않는 아이의 젓가락질은 눈이 보이지 않는 아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
아무리 진지한 자세로 젓가락 끝에 닿는 물렁한 회의 느낌을 찾아 집중을 하지만 번번히 딸려 올라오는 건 아이가 휘젓고 지나간 양념에 무 썰어놓은 것 뿐이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지영아, 아빠도 좀 먹어야지. 너만 그렇게 맛있는 거 골라먹으면 어째~~!'
그러면 아이가 하는 말이 하나 꼭 있다.
'아빤 왜 자꾸 꼭 양념만 집어먹는데?. 난 이렇게 잘 짚는대~~'
완전 천불이 따로 없다..~~ ㅋㅋ
물론 지금이야 아빠를 위해 생선 가시도 발라주고 라면도 잘 끓여주는 착한 딸이 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자기보다 못한 아빠의 행동이 낯설게 보였음에 틀림없으리라.
요즘도 학교에서 점심 급식 시간 때 보노라면 젓가락질을 포함해 기본적인 식사 기술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시각장애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것을 자주 알게 된다.
물론 일차적인 책임이야 본인에게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못보는 아이니까, 불쌍하고 가여운데 그렇게라도 먹는게 어디냐는 부모의 근시안적인 과잉 보호와 비교육적인 묵인과 동정이 오랜 시간 동안 낳은 결과가 아닌가 한다.
얼마 전 다녀온 미국 퍼킨스 맹학교에서 제씨라는 교사는 시각장애 아이에게 하나의 기술을 가르쳐 주고 나면 즉시 뒤로 물러나 다시는 같은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을 큰 자랑인 것처럼 강조하며 건물 내부벽에 포스터로 '한 발 물러서는 19가지의 방법(19th ways for stepcback)'이라는 문구를 붙여두기까지 했다.
또 볼티모어의 NFB에서 만난 현 시각장애인 마워 회장은 몇 년전까지만 해도 미국내 디즈니랜드 등에서 시각장애인들도 다른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줄 서있는 다른 일반 관람객보다 먼저 놀이기구를 탔지만 그것이야말로 차별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항의를 했으며, 지금은 일반인과 똑같이 줄을 서서 이용한다는 것을 자랑처럼 내게 말해 주었다.
짧은 며칠 동안의 체험이었지만 그들과의 대화에서 느낀 점은 놀라운 기술이나 새로운 물건에 대한 경탄이 아닌 그들의 독립된 자아와 가치관이었다.
시각장애란 사회적인 잣대로는 분명 불쌍하고 어려운 존재임에는 틀림없겠지만 최소한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고 습득한 독립심과 그에서부터 출발한 자신감은 성인이 되어 일반인들과 사회의 높은 벽 앞에서도 당당하게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든 토대가 되었음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오늘 특수학교의 교사 아니 나 자신을 위한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동해안에는 때아닌 폭설이 내렸지만 시장 한 켠에 자리한 나물 코너에는 어느새 봄나물이 하나 둘 선을 보이고 있다.
내일은 달래무침 반찬을 아내에게 부탁할 생각이다.
나물 반찬은 아무래도 새로운 나의 젓가락 연습 상대로 적합할 것 같으니까..
토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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