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의 이해

아직 꿈이 있습니다

tosoony 2011. 2. 10. 21:32

아직 꿈이 있습니다

 

김정희(전공과2학년

 

“오늘도 대전역으로 가나요?”

“네에~”

“사람들한테 안마 봉사하는 것 힘들지 않아요?”

“아니에요. 제가 이렇게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 수 있는 게 저는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데요.....”

사실 그렇다. 60평생의 시간을 돌아보면 지금 생활이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 시간인지 모른다. 그동안 암흑 속에서 겪어야 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모두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충청남도 정미면 모평리에서 육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오빠 세 명과 언니 다음으로 태어난 나는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세 살 되던 때 홍역으로 실명(失明)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시골의 가난한 집안에서 ‘앞 못 보는 아이’는 가족들에게 큰 짐이었다. 그 당시 부모님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맹학교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른 채 한 명의 입이라도 줄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서럽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일이 있다.

여덟 살 때였을 것이다. 큰아버지댁에 사시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앞이 안 보이는 나를 측은하게 여기시고 늘 자애롭게 대해주시던 할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아팠는데도 나는 큰집에 갈 수 없었다. 봉사 딸을 부끄럽게 여기시던 부모님은 친척들이 많이 모이는 그곳에 나를 데려가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가족 모두 할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만 혼자 빈 집에서 밤을 지새는데 밖에서는 ‘야옹’ 거리는 들고양이 울음소리와 ‘윙윙’거리는 바람이 집 주위를 돌며 사납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슬픔과 혼자라는 두려움과 서러움이 복받쳐 하염 없이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때부터 나는 어린 마음이지만 나의 처지를 절감하고 독한 마음을 먹기 시작한 것 같다. 피나는 노력으로 남들보다 열심히 살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내 처지에서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 했다. 부모님이 들일을 나가시면 집안에 남아 있던 나는 눈치껏 알아서 물 긷고, 방아 찧고, 새끼줄을 꼬고, 빨래하고, 동생을 돌봤다. 그러다 먹을 게 없어 배고프면 동생을 들쳐 업고 친구들과 들로 산으로 먹을 것을 찾으러 나서서 소나무껍질과 산열매 등을 따먹었다. ‘앞도 못 보면서 어떻게 산으로 가는 길을 알까’ 하는 이도 있겠지만 하느님은 다 살아갈 길을 마련해주시나 보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감각은 더욱 발달하여 동네 길은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었다. 그러니 ‘눈감고도 다닌다’라는 말이 맞지 않을까?

우물가에서 보리쌀뜨물을 얻어다가 돼지를 키우고 틈틈이 집안일을 돕는 사이 학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움과 함께 나도 배우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러나 내 형편에 학교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할 수 없이 학교 끝나고 돌아오는 오빠들을 붙들고 물어서 구구단을 익히고 이것저것 귀동냥으로 얻어 듣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집안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서 마을의 어느 부잣집에 아이 돌보미로 들어오라는 제의가 있었다. 한 입이라도 줄여야했던 부모님께서는 그러마고 하셨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보니 아이돌보는 일이 아니라 방아 찧기 등 집안의 중노동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갖은 고생을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고 보니 집안에서는 혼기가 찬 오빠들의 혼사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에서도 나는 식구들의 걸림돌이었다. 앞 못 보는 시누이가 있는 줄 알면 시집보내지 않을 것이라며 중매쟁이들이 올 때면 나를 나뭇단 속에 숨겨놓거나 곳간에 들어가 있게 하였다. 서러운 생각에 또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도 모를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럴 때면 ‘계집애가 재수 없이 눈물이나 짜고 있다’고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이런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세월은 흘러 스무 세살이 되었다. 내 장래에 대해 골돌히 고민하다가 점이라도 배워서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수소문 끝에 어느 법사님을 찾아갔다. 수양딸이 되어서 집안일을 해주며 숙식을 해결하고, 점을 배우는 삯으로 한 달에 쌀 세 말 씩을 내기로 했다. 낮에는 집안일을 해가며 밤에는 서 너 마디 정도씩 배워가며 두 해쯤 지났다. 집안형편은 여전히 어려워 삯으로 내기로 한 쌀이 석 달이 밀려 한 가마니 정도가 되었다. 법사님은 밀린 삯을 받을 요량으로 여기저기 씨받이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천대받고 멸시받을 생활이 뻔한 그런 자리는 죽으면 죽었지 가기 싫었다. 완강하게 거절하자 이번에는 혼처를 구했다. 그때 인연이 되려고 했는지 6.25전쟁 때 피난을 내려와 잡화상과 고물장수를 하는 홀아비가 나타났다. 나는 그 사람에게 딱지를 맞을 생각으로 쌀 두가마니를 빚을 갚아 주어야 시집갈 수 있다고 하였다. 그 사람은 쌀 두가마니를 지불하면서까지 나와 결혼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사람은 선뜻 두가마니를 내놓고 서둘러 간단한 혼례식을 치르자고 했다. 집안에서 별 반대도 없었고 일은 빨리 진행되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집이라고 와보니 기가 막힐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40세인 줄 알았던 남편의 나이는 무려 57세였으며 괜찮은 형편이라던 집은 집터도 없이 남의 터에 세를 주고 지은 집에서 어렵게 간신히 살아가는 신세였던 것이다.

돌아갈래야 돌아갈 곳도 없는 처지가 원망스러웠지만 한탄만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배운 기술이 점치는 일이었으므로 점치는 일을 하면서 남편을 돕기로 하였다. 남편이 잡화로 상수리나 도토리, 콩과 바꾸어오면 묵을 쑤어서 팔고 콩나물을 길러서 팔기 시작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더듬더듬 지팡이를 짚고 다니다 보면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은 예삿일이었다. 때로는 측은하게 여기며 물건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허기가 져서 주저앉으면 힘내라고 위로해주며 헌옷을 모아주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이 태어나 네 남매를 두게 되었다. 이제 여섯 식구가 되었으니 먹고 사는 것만도 큰일이었다. 닭과 개를 기르며 가축의 분뇨는 모아서 채마밭에 거름으로 져 날라서 채소를 길렀다. 비위가 약한 편인 나는 거름지게를 지고 밭으로 가다보면 거름냄새에 구역질이 올라오고 발을 헛디뎌 구덩이라도 빠지게 되면 고꾸라지면서 분뇨를 뒤집어쓰고 나뒹굴어지곤 했다. 이럴 땐 정말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며 살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사는 일은 힘들지만 죽는 일은 쉬워보였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살아야만 했기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채소를 머리에 이고, 아이가 이끄는 손을 따라 이집 저집으로 팔러 다니며 한 푼 두 푼을 악착같이 모아 나갔다. 남편은 점점 늙어가며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고, 아이들은 점점 자라가고 있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는 와중에서도 작은 기쁨은 있었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총명했다. 아침 조회시간에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확성기소리에서 상장을 받는 우리 아이들의 이름이 호명되어질 때면 피곤에 지친 몸과 마음이 씻은 듯이 가벼워지면서 행복감에 젖어 있기도 하였다. 그리고 비록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었지만 드디어 방 두 칸짜리 내 집과 900평의 내 땅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나는 해낸 것이다. 아이들이 학교 갔다가 돌아와 “엄마” 하고 부르면 맞이하여 고구마, 감자, 옥수수를 삶아 주고 재잘거리며 학교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과 살아가는 시간이 행복했다.

세월이 흘러 큰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둘째는 초등학교 6학년, 셋째는 3학년, 막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여전히 매일 매일이 바쁜 일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저녁 무렵, 이웃집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가을걷이 일을 도와주고 돌아오던 남편이 오토바이에 치여 병원에 실려 갔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그 뒤 5년여 시간을 병을 안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불행은 연이어 오나 보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몸져 누워있을 때였다. 친정어머니가 찾아오셨는데 뭔가 말씀을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계셨다. 어렵사리 꺼낸 말씀은 그동안 큰 아이의 고등학교 입학금으로 올케 언니한테 한 푼 두 푼 붓던 계가 깨졌다는 것이었다. 올케언니는 집을 나가 버려 연락이 되지 않고 그 동안 부어왔던 곗돈은 원금조차 돌려받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몇 달 후면 큰 아이 고등학교 입학금을 내고 학교를 보내야 하는데, 하늘이 캄캄했다. 정말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는 상황이었다. 목이 바싹 바싹 마르고 잠이 오질 않았다. 사정을 알게 된 큰 딸은 산업체 야간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하며 별다른 내색 없이 인천으로 떠났다. 며칠이 지난 후, 딸이 이전에 입학하려고 했던 인문계고등학교의 합격통지서가 집으로 배달되어 왔다. 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또 세월은 흘렀다. 큰 아이가 산업체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하여 둘째아이의 학비를 대줄 수 있게 되었다. 삼년 후에는 둘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국민은행에 입사하여 두 딸이 벌어서 셋째아들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게 되고, 막내딸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우리 가족은 별다른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하느님이 주신 마지막 시련의 관문이 또 하나 남아있었다. 우리가 경작하던 밭을 이웃집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몰래 팔아버린 것이다. 몇 십 년 전,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과 주변의 땅을 사면서 오랜 기간 미등기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그것을 이웃집 사람에게 의뢰해 등기를 하기로 했는데, 애초에 땅 욕심이 있었던 그 사람은 그 땅을 자신의 소유로 등기를 해버렸던 것이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방치한 것이 화근이었다. 해결하려면 민사재판밖에 길이 없다고 하여 우리는 기나긴 법정싸움에 들어갔다.

그 시절 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 있었다. 특히, 두 다리가 없는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일이 법정까지 따라다니며 애써주신, 지금은 고인이 된 안길순 회장님은 참 고마운 분이다. 우리 같은 장애인들은 뭉쳐야 산다고 하시며 아무리 늦은 밤이라고 해도, 날이 궂어도 일일이 상담해주시고 여기저기 주선해 주셨다. 10년이라는 긴 시간 끝에 드디어 승소를 하고 피땀 어린 그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진에 ‘당진군지체장애인협회’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때였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힘들기는 했지만 전화위복이 될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일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도 밭고랑에 앉아 호미를 쥐고 있을지 모르겠다. ‘협회’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 같은 개인이 하나가 아님을 깨달았다. 각기 상황은 다르지만 나름의 장애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나 역시 내가 가진 장애를 재활을 통해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이가 51세였다. 일단 글을 익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한국시각장애인복지재단’에 4개월간 입소하여 점자의 원리를 익혔다. 퇴소하여 집에 오는데 그 발걸음이 기쁨으로 넘치기도 하고, 더 배우고 싶은 아쉬움이 절절하기도 했다. 노동으로 굳어진 손은 점자를 식별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 오전 내내 책을 붙들고 있어도 고작 세 줄을 읽어내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더 이상 가르쳐 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었다. 낮이나 밤이나 책을 끼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을 잘 때도 점자책을 안고 잤다. 그러던 차에 컴퓨터를 알면 글을 읽기가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에 ‘맹인안내견학교’에서 주관하는 ‘삼성맹인컴퓨터교실’에 다니기 시작했다.

몇 차례의 재활교육과정을 이수하면서 우리 고장에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기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뜻이 맞는 몇 몇 사람들과 협력하여 장애인협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그때에도 당진에 ‘시각장애인협회’라는 이름은 있었으나 사무실이 없었다. 우선 급한 것이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우선 우리집에 협회전화를 설치하고 한명 한명 회원들을 모았다. 그리고 사무실 마련을 위해 노력한 결과 당진지체장애인연합회 사무실 한 켠에 ‘당진시각장애인연합회’의 둥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사무국장으로 근무하면서 회원들에게 점자교육, 풍물놀이, 보행교육, 밑반찬 배달 사업을 추진하고 정기총회를 개최하면서 회원들의 연합을 주도하고 사회 속으로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 ‘당진시각장애인협회’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충남도지사로부터 ‘장애극복상’이라는 큰 상도 수상하게 되었다. 협회 일을 하다 보니 그동안 못 배운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본 결과 일 년에 두 차례 검정고시제도가 있다는 것과 대전맹학교에 고등학교, 전문대학과정이 개설되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낮에는 사무실에서 근무하고 퇴근 후 새벽 1시까지 공부를 하고 다시 새벽 4시에 일어나면서 공부를 시작한지 1년 후인 2005년, 드디어 중입검정고시와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06년, 내 나이 예순! 대전맹학교 고등학교 과정에 입학하게 되었다. 꿈에도 그리던 학생이 된 것이다. 예전에 친구들이 학교 다닐 때 그렇게 부러워만 했던 일들이 실현된 것이다.

 

지금 나는 대전맹학교 대학과정 전공과 2학년 학생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학생증을 꺼내서 어루만져보곤 한다. 그리고 1년 반이 지나면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주관하는 학점은행제에 의한 이료전문학사 학위도 취득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의 세월들을 생각해보면 결코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고 다시 살아야 한다면 자신 없는 일들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뿌듯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한순간 한순간을 치열하게 살았기에 보람도 크다. 아이들을 낳아서 키운 일도, 협회 사무실을 만든 일도, 그리고 지금 60세에 안마를 배우고 침술을 배워서 봉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도 참으로 행복하고 감사하다. 그저 도움을 받기만 하며 살 줄 알았는데 나의 손으로 도움을 주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다.

가끔 우리 아이들과 모여 추억을 얘기할 때가 있다. 둘째딸은 지금도 자신은 칼국수나 수제비를 싫어한다고 얘기하며 웃곤 한다. 지금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게 된 것도 엄마의 영향이라며 감사하다고 한다.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뭐라 말할까? 우리 딸의 말에 의하면 인생은 ‘비밀’이란다.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던 내가 여러 사람들의 도움 속에서 꿈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태초에 계획되었던 비밀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의 나머지 생애에 대한 비밀은 무엇일까? 나는 아직 많은 꿈을 가지고 있다.

내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며 세상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싶다. 아직도 어둠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서 꿈을 가지고 빨리 세상 속으로 나오라고 말하고 싶다.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생의 장애가 아니다. 꿈을 갖고 도전하여 세상을 비추라는 것이다. 삶에 꿈이 있으면 그 꿈은 언젠가는 다 이루어지니까 말이다.

나를 세상 속으로 나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 글을 마친다.

 

- 대전맹학교 2010년 교지 '빛이 있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