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수먹고 속차리라는 말은 누구나 들어보았을 듯 하다.
속을 차릴수만 있다면 어디 냉수인들 마다하랴만 요즘 때 아닌 냉수가 전세계를 유령한다.
근육이 마비되어가는 루게릭병을 앓고있는 환자들을 위한
일종의 포퍼먼스로 냉수를 머리부터 퍼붇는 장면을 인증샷하거나
기부금을 내는 것중 하나를 선택하는 듯싶다.
퍼포먼스와 기부금을 동시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선택사항으로 하나를 하면
다른 하나는 면제되는지 나로선 알지못한다.
얼음물을 퍼부은 사람이 다음 행위자로 세 명을 지명하면
지명당한 사람이 이 행위에 동참하고 다시 세 명을 지명하는 방식이란 설명을 들었다.
죽어가는 환자를 위하여 행해지는이런 릴레이가 시비의 대상일수는 없겠다.
그 기사를 넘기고 다음에 들어오는 기사를 보는 순간 그러나
온몸이 찬물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얼어붙은 듯해진다.
먼저 죽어간 그래서 가슴에 묻을수밖에 없었던 그러나 그녀를 위하여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아버지.
단지 그가 택한 유일한 방법은 곡기를 끊는것뿐이란 이 참담함을
찬물뒤집어쓰기란 사랑의 행위를 삐따닥하게 바라보게하는지 모르겠다.
시비에 휘말리지 않고 신문지상에 이름도 오르내리고
나는 이 정도는 착한 사람이야 하는 공인까지 얻을수 있을터이니
지명당한 사람들이 마다하지 않고 찬물을 머리부터 뒤집어 쓰는 것임은 분명하다.
여기부터는 다소 오해의소지도 있고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근육이 굳어가는 불치성환자와 굶어죽어가는 중년의 남자중
누구의 목숨이 더 중하고 누구를 택할것이냐 하는 질문은 어리석다.
나의 분노는 살리기위한 행위가 왜 선택적이냐 하는것에 있다.
불치병을 홍보하고 동참을 호소하고 성금을 모으는 일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럼 진실을 알기위하여 곡기를 끊어버린 중년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모는 그 행위는 대체 무엇인가!!
정당간의 시비가 있느냐 욕을 먹지않아도 되느냐의 차이에서
찬물 뒤집어 쓰기를 택한 것이라면 그런 선택이야말로 가장 정치적 행위다.
본인스스로는 정치중립적이고 인간애의 발로라 할지모르겠으나
정당간의 다툼이라 외면한 그 순간 그는 이미 한나의 정파에
손을 번쩍 들어버린것이된다.
지배자에게 불리한 일이 얼마나 제대로 서술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란 오명도 함께 존재한다.
한날 한시에 세상에 나온 내 얼굴 내 손도 양쪽이 서로 다르다고한다.
한부모 밑에서 태어난 형제자매도 모두 다르다.
하물며 각자가 처한 입장과 상황이 다른 사람들이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국가를 만들어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이유는 국가를 위한 애국에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이기적 행위다.
이 명제의 반대는 국가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하면
국가의 존재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을 뜻하며
새로운 이기적 판단을 모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국가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행위가된다.
정부라는 조직이 정당이란 정치결사체가 이런 행위를 부추기고
그런 행위로 국민을 내모는 것이 정치적 이해의 충돌로 해석되어질수 있는가는
굉장한 비극의 시작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영원하다는 말뿐이란 사실을 되새기면
정부여당이 영원하지 않을것이란 사실은 진실이된다.
정부여당에 불리한 모든 일은 감춰지거나 숨겨지고
모든 일이 그런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과연 공동체는 존속할수있을까??
그렇게 정부여당에게 유리한 일들만으로 우리는 살아갈
능력을 가진 것일까?
장애인은 늘 약자이고 소수자일수밖에 없는 존재다.
여성이 약자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전벽해라 할만큼 변화되었다.
그 변화에는 여성해방이란 기치도 있었지만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란 숫자의 논리도
무시할수없다.
그렇다고 사회적 약자를 거론할때마다 등장하는 노인 어린이 동성애자보다 장애인이
월등한 지위에 오를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타 사회적 약자보다 더 관심을 받을 개연성을 어디서도 발견할수가 없다.
장애인의 사회적 권리는 가장 늦게오는 경향성이 있다.
그런 경향성을 추동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이며 연대의 소산임은 분명하다.
노인과 장애인의 처지가 다르지않고
대기업의 노동자와 소자본 점포주가 다르지 않다는 연대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졌다고 빼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들이 못가진 것에 힘을 모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도 관심을 모으는 것,
그것이 연대의 기본틀이 아닐까!!
뒷집에 도둑이 들었을 때 난 잃어버린 물건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앞집에 불이났을때 우리집으로 번지지 않아 구경을 했다.
뒷집에 응급환자가 발생했지만 우리집에는 아픈 사람이 없으므로
내 자동차를 옮겨주지 않았다.
내 집에 도둑이 들고 불이나고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나를 도와줄 앞집 옆집 그리고 뒷집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찬물 뒤집어쓰고 인증샷하는 것도 함께하는 것임은 틀림없다.
거기서 조금 더 내딛거나 옆으로 눈길을 돌아봄을 주문하는 것이
과욕일까, 아니면 너무 조급함일까....
사십일이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않고있는 딸 잃은 아버지를
저렇게 죽어가도록 방치하는것이 우리의 미래인지 자문할 일이다.
혹 그가 죽는다면 그의 죽음은 단지 딸 잃은 아버지의 죽음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모든 생명의 소멸의 시작이라 단언한다.
그를 살려내는 일은 우리를 살려내는 일이다.
- '넓은마을'에서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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