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교단

2월의 단상

tosoony 2011. 3. 2. 01:57

-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끝남과 또 다른 시작이 잇닿은 졸업은 여전히 2월의 꽃이 되고 있다. 이맘때가 되면 언제나 내 귓가에는 졸업가의 합창소리가 들린다. 그러면서 흘러간 시간만큼 퇴색한 기억들이 새삼 생명을 얻는다.

수많은 은사님들과 친구들이 이승을 버린 지 40년이지만, 내가 뒤적이는 파일 속의 얼굴들은 여전히 그 나이와 그 목소리로 멈추어 있다. 우리식의 야구를 하면서 휘두르던 수많은 헛발질도, 땀 냄새 그득한 유도장의 업어치기도, 상대의 샅바를 잡고 힘쓰던 모래 위의 청춘도 한 꺼풀만 들추면 푸르게 피어난다.

대체로 늦깎이 학생이던 우리의 흡연순간을 포착하려던 호랑이 선생님의 잰 발자국소리도 저만치 걸어 나오고, 너무나 소탈하여 형님이나 친구 같은 느낌이 들던 선생님의 수더분한 목소리도 마주치게 되는 2월이다. 영화나 소설 속의 이야기를 원작보다 더 재미있게 각색하여 들려주시던 선생님은 또 누구의 할머니로 저물고 계실까. 고운 목소리로 설파하던 이야기는 당시 최고 걸작 영화인 ‘사운드 오브 뮤직’과 함께 아직 내 가슴에 촉촉이 남아있고, ‘홍작’이라는 일본소설도 잊지 못할 두근거림으로 기억을 되뇌게 한다.

2월의 책갈피에는 참 많은 옛날의 기억들이 끼워져 있다. 도드라진 곳은 문자요, 반질한 곳은 줄 간격인 ‘자유벗’이라는 잡지 위를 질주하던 검지의 고행도, 우리나라에 첫 선을 보이던 라면을 운두(편집자 설명: 그릇의 둘레나 높이를 뜻함) 높은 양동이에 겨우 몇 봉지 털어 넣고 끓인 풍덩한 국물로 여럿의 젊은 식욕을 달래던 입맛도, 봄방학이면 다음 학년에 대비하여 스스로 교과서를 인쇄하고 제본하던 자급자족의 경험도 향수처럼 고개를 든다.

그뿐이겠는가. 묵묵히 교정을 지켜온 은행나무·백송나무와 저녁나절의 소쩍새 울음소리, 인왕산의 바람소리도 귓가에 겸연쩍은 악수를 청하고, ‘청춘 예찬’이란 과목을 들으며 꿈을 부풀리던 시간도, ‘별’이란 단편소설을 읽으며 순박한 사랑에 가슴 저미던 시간도 검정교복 안에서 수런거린다.

비록 초라한 식단이었다고는 해도 학교식당과 그 안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풍경을 떠올리면 지금도 침이 고인다. 밥 한 그릇에 콩나물국 한 그릇씩 앞에 놓고 각자 주머니에서 자기의 숟가락을 꺼내 들던 우화 같은 풍경이 우리의 일상이었던들 그마저 그리워지는 걸 어쩌랴. “내 고춧가루 좀 타 먹어봐.”, “내 고추장 좀 넣어봐.”, “이 구운 김도 덮어 먹어봐.” 마치 원시 부족들의 대화 같던, 기억 속 그때의 영상도 이제는 조각난 그리움의 편린들이 되었다.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란 고별의 노래를 들으며 눈가를 적시며 우리는 또 그렇게 약속 없는 미래 속으로 낙엽처럼 흩어져 갔지.

교문을 나서던 그날의 우리는 어떤 숫자로도 나눌 수 없어 이 집합에서 저 집합으로 던져지던 애매한 홀수였을지 모르지만, 세월의 시계추는 어느새 밤 아홉 시쯤의 눈금에다 우리를 얹어놓고 남은 눈금을 세어보게 한다.

2월만큼 회상을 자극하는 달이 있을까? 더러는 지워지고 더러는 가물거리지만 그 무엇보다 우리를 가장 허탈케 하는 건, 늘 부르면 응답하던 벗들이 어느 순간 사라져 수첩에서 그의 전화번호를 지워야 하는 일이 아닐까. 떠난 이들은 말이 없고 남은 이들은 잠시 그들의 이름을 되뇌이다가 또 제 박자, 제 장조대로 잊혀져 가려니와, 별난 인연으로 만나 친구라는 이름으로 곁에 머물다 먼저 생을 내린 벗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는 건 아마도 미처 못 다한 말이 아직 남아 있거나 온전히 잊혀진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겠지…….

우리 누구나 잠시 지구별에 머물다 이름 모를 별나라로 떠나가듯이, 그네들도 어느 다른 별에서 입학과 졸업의 감격을 누리며 너와 나의 또 다른 새 학년을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

오래된 모든 것들은 변색하여 바랜다. 그러나 멀수록 선명해지는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추억의 빛깔이 아닐까. 2월이 뿜는 그리움이라는 페로몬 앞에 온 가슴으로 허기를 느끼는 이 계절도 또 이렇게 보내게 되겠지.

이제 곧 3월이다. 어느 볕 좋은 날, 아름답거나 눈물 같은 그날들을 기억하는 어떤 이와 나란히 곁하고 커피향 짙은 시간을 함께 마시며 그때로 돌아간들 설마 이만큼이야 쓸쓸하겠는가.

 

- 이진규 브레일타임즈 독자마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