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예술제라는 행사가 열린 모양이다.
곰곰히 생각해보자.
모두가 장애를 어찌 바라보아야할지 재정립이 필요한 문제이다.
이 고리를 풀어야 다음 단계가 열릴지도 모른다.
자, 스스로 답하시길 바라며 돌발적 질문을 한다.
개인적으로 거론되는 이 용복님께는 매우 죄송한 사과의 말씀을 올리며
언제든 어떠한 상황해서든 응분의 책임을 피할 생각이 없음을 밝힌다.
이 용복님은 맹인가수로서 노래를 하였을까? 아니면 가수로서 노래를 하셨을까?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 분께서노래를 부르실 때 시각장애는 어떠한 영향을 주셨을까?
하지만 진정한 평가는 그 분의 노래는 맹인가수로서가 아닌 한 명의 뛰어난
뮤지션으로의 평가일 때 더 빛날것이다.
그 분의 검은 선그라스와 상관없이
그처럼 미성의 가수를 나는 아직 모른다.
처연하기만 한것도 아니며 개구장이같은 순진발랄함은 또 어떠한가?
무대에서 보여주셨던 그 많은 유머는 단지 그 분을 맹인가수로 머물게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모니카를 연주하시는 전 재덕님은 어떠한가?
아직도 그 분 소개에 맹인 하모니카연주인이란 말이 필요한가!!
아니다.
이용복님은 가수라는 소개로 충분하며 전 재덕님은 하모니카연주인으로 충분하다.
나머지는 사족이다.
그 앞에 다른 말이 붙는다면 두 분의 음악성을 모독하는 말이될지 모른다.
이 용복님은 맹인가수로 불려서는 않된다.
그저 가수 이 용복이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장애인예술제인가?
곰곰히 따져볼 문제이다.
우리 시각장애인 학생중에 바이올린부분에서 입상하였다는
기사 가 눈에 띈다.
나는 음악을 모르지만 듣는 데 지장은 없다.
시각장애인 피아노는 따로 있는가?
시각장애인 바이올린은 따로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장애인 예술제는 왜 필요한것인지 고민해보아야한다.
진정한 예술가의 평가는 바이올린 연주자이면 족하지 않을까?
거기에 시각장애연주자란 말은 사족이며 두 번 죽이는 말이다.
장애인연주자란 타이틀로 무엇을 할수있을까?
그냥 연주인이면 족하다.
그 연주인으로서의 평가로 당당히서고
나머지에만 시각장애를 말하면된다.
오히려 시각장애인연주자란 타이틀이 그를 가두는 족쇄가된다.
시각장애가 부각되면 그의 뛰어난 연주와 음악적 재능은 묻혀버릴
가능성이 크다.
장애인예술제를 준비하시는 분들이 다시한번 되새겨볼 일이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장애인을 위한 예술제는
일반 예술제에 참가할 수 있도록 후원해주는것으로 방향을 돌리면 어떨까싶다.
그래야 우리끼리의 그들만의 리그가 되지않는다.
이것이 통합으로가는 첫걸음인지도 모른다.
난 지금 이 용복님의 어린시절을 흥얼거리고있다.
물장구치고 다람쥐 던 어린시절은 없지만
그 노래를 부르면서 뛰놀던 어린시절을 생각하며 이 용복님의 건강을 빌어본다.
- 넓은마을에서 강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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