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세발 자전거 보낸이:문성준 (tosoony ) 1998-02-23 23:21 조회:22 나는 자전거 타기를 참 좋아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우리집에는 누나를 위해 부모님께서 사둔 세발자전거가 한대 있었다. 그것도 녹슬고 낡게 되어 내가 3살인가 4살 때 세발 자전거를 새로 사주셨다. 뒷자리에 사람을 태우게 되어있는 그 자전거를 나는 비닐덮개도 떼지 않은 채로 한참동안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하며 그렇게 타고 다녔다. 그런 탓에 나는 자전거에 늘 익숙해있었고 그것을 모는 동안이면 내 마음속에선 내가 마치 커다란 자동차를 모는 사람인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시간만 나면 서울 변두리의 오밀조밀하고 지저분한 동네 뒷골목을 돌아다녔고 집에서 너무 멀리까지 가버려 집을 못찾아 헤매인 적도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 동생이 제법 자라게 되자 난 그녀석을 뒤에 태우고 다니는 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녀석은 형이 대단한 사람처럼 생각해 주었고, 그 맛에 나는 녀석에게 한번도 못가본 길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어린 탓에 그 애는 금방 싫증을 내기도 하고 배고프다며 울어대기도 자주 했다. 한번은 언덕길에서 무심코 일어섰다가 자전거가 그만 뒤로 구르면서 훌렁 넘어지는 바람에 동생 녀석을 다시는 못볼 뻔 하기도 했다. 그러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세발 자전거는 더이상 내가 이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늘상 엄마 아빠 할머니에게 두발 자전거 타령을 하며 그분들의 바지춤을 여러차례 붙잡고 늘어져보기도 했건만 당시로서는 워낙 비싼 가격의 두발 자전거는 우리집 형편에는 무리였다. 종암동에 있는 숭례 국민학교에서 집까지 걸어오면서 언제나 마음속에서는 이 길을 시원스럽게 달리는 자전거에 올라탄 내모습을 상상해 보는게 나의 습관이었다. 내가 6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중곡동의 마당과 화단이 있는 양옥집으로 이사를 했고 아버지는 마침내 나의 오랜 숙원을 들어주셨다. 너무도 벅찬 마음으로 자전거 가게에 들어섰을 때 내 눈에 띈 것은 오토바이형으로 된 번쩍거리는 자전거였고 나는 서슴지 않고 그것을 택했다. 그날부터 난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달려오기가 무섭게 자전거를 몰고 나가는 게 유일한 나의 낙이 되었다. 나는 몇 시간만에 넘어지지 않고 두발 자전거를 몰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손으로 타기, 양손놓고 타기 등등 온갖 재주도 피울수 있을 만큼 자전거의 명인이 되었다. 단점이라면 다른 자전거보다 몸체가 무겁고 기어가 없어 오르막길 등에서는 힘이 든다는 점이었는데 그바람에 숙제도 제대로 못하고 곯아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런던 어느날 갑자기 오른쪽 눈이 안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로 중요시 여기지도 않고 속으로만 이상하다며 그냥 며칠을 보냈다. 어느날 밥을 먹다가 엄마에게 지나가는 말로 눈의 증상을 이야기하고서야 난 내 증상이이 심각함을 알게 되었고 망막박리로 인한 두차례의 수술을 받게 되었다. 근시로 인해 발병할 수 있는 병이었음에도 우리집 어른들은 나의 지나칠 정도의 자전거 집착 때문에 발병했다며 내가 그토록 아끼던 자전거를 팔아버렸다. 수술은 실패로 끝났고 난 남은 한쪽의 시력으로 일상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전거가 없는 생활은 한쪽눈을 실명한 것보다 더욱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그동안 내 동생과 아버지의 필요에 의해 다행히 새로 자전거가 생겼고 가족들의 불안과 우려속에서도 나는 새로 산 자전거를 멋지게 타 보임으로써 다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새로 산 자전거는 완전한 성인용 자전거였는데, 나는 온갖 장식과 장치를 해가며 그것에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그런 생활도 중학교 2학년 겨울, 남은 한쪽의 눈의 망막이상이 생김으로써 종지부를 찍고야 말았다. 이후 우리집의 자전거는 관리하는 사람없이 마당 한켠에서 아무렇게나 비바람을 맞아 녹이 슬어갔다. 우리 집 딸래미가 지난 설에 받은 세배돈으로 무엇을 사줄 것인가 고민하던 나와 집사람은 아이에게 자전거를 사주기로 결정했다. 이미 4살이니 충분히 탈 나이는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나이에 알맞는 아이만의 정서를 갖게 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막상 장난감 가게에 들어서니 무척 많은 자전거가 있었다. 세발 자전거도 그간의 세월에 따라 많이 발전해 있었는데, 무게도 가벼워졌을 뿐 아니라 몸체가 대부분 프라스틱으로 되어 녹슬 염려도 없었고 따르릉 소리 대신에 전자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특히 한쪽에 놓인 자동차형 자전거는 정말로 사주고 싶은 것이었다. 어렸을 적 동네에 사는 부잣집 아이가 몰던 빨간색 자동차형 자전거를 쳐다보며 부러움에 바라보던 바로 그 물건이었던 것이다. 일반 세발 자전거의 두배의 가격이었지만 구입에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난 그렇게 갖고 싶었던 그 자전거를 사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억누르고 보통의 세발 자전거를 사주기로 결정했다. 부모의 욕심으로 인해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순수한 추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녀석은 그것만도 너무 좋은 모양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동안까지 딸래미는 그것을 한시도 놓치 않으려 하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전거에게로 달려가곤 한다. 그래, 마음껏 타련. 이 아빠처럼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달려가고 원하는 곳을 너의 힘으로 달리는거야... 나중에 네가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때 이 아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마.. 토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