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의 이해

시각장애인 PC 게임의 어제와 오늘

tosoony 2017. 10. 17. 00:09

  한국 사회에서 PC 게임은 폭력성, 선정성, 중독성으로 늘 경계 대상이 되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게임학’이 대두되면서 게임의 문학성, 예술성 등 게임의 긍정적인 면도 점차 부각되고 있다. 게임 산업 역시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올해 1월 24일 더불어민주당 김병관 의원 등 11인은 법적인 ‘문화예술’의 범주 안에 게임을 포함시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문화예술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이처럼 게임은 많은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현대인의 놀이 문화의 중심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시각장애인 게임 문화는 어떤 모습일까? 20여 년간 시각장애인들이 PC 게임을 어떻게 즐겨왔을까?
  “가라사대 카드와 도스용 스크린리더 SRD가 출시되면서 머드(MUD)게임이 큰 붐을 이루었어요. ‘신세계’, ‘마법의 대륙’이 대표작입니다.”
  시각장애인 머드게임 관리자 J 씨는 1990년대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 최초로 붐을 일으킨 게임 장르가 머드게임이었다고 전한다. 머드(MUD)란 ‘Multi User Dungeon’의 약칭으로 텍스트 기반의 온라인 게임이다. 온라인 속 하나의 세계에 다수의 유저가 접속하여 채팅 방식의 상호작용을 하면서 즐기는 게임으로 초보자의 타자 연습에 적합하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머드게임의 특성상 중독성이 강하여 많은 ‘게임 폐인’을 양산하기도 했다.
  이러한 텍스트 기반 머드게임은 20여 년 전 처리 능력이 부족한 컴퓨터와 느린 네트워크 환경에서 구현 가능한 거의 유일한 온라인 게임이었다. 따라서 정안인과 시각장애인은 완전히 동등한 입장에서 게임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머드게임 이후로는 점차 그래픽이 중시되는 방향으로 게임이 발전해 갔다. 당시의 이 상황을 J 씨는 “처음에는 정안인들과 함께 게임을 했지만,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서 정안인들이 하나둘 떠나고 시각장애인만 남게 됐다”고 회상했다. 머드게임 이후 시각장애인 게임 문화는 정안인들과 점차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각장애인계에서 온라인 머드게임의 붐을 이어 받은 게임 역시 FMUD, 무림협기 같은 텍스트 기반의 게임이었다. 이들 게임은 머드게임과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온라인 게임은 아니었다. 이 열기를 이어 받은 다음 세대의 게임이 바로 ‘센스게임’이다.
  ㈜엑스비전테크놀로지에서 출시한 센스게임은 전형적인 온라인 대전 게임 서비스이다. 센스리더가 출시되면서 한국 시각장애인들은 윈도우즈XP 운영체제에 안정적으로 적응할 수 있었고 게임 역시 윈도우즈 기반인 센스게임이 크게 환영받았다. 센스게임은 게이머가 센스머니를 걸고 뻥 게임, 고스톱, 윷놀이 등의 다양한 대전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시각장애 대학생 L 씨는 “센스게임과 함께 여러 오디오게임들도 해외에서 출시되었으나 영어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별로 유행하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2010년 이후 스마트폰이 급격하게 보급되면서 정안인들 사이에는 모바일 게임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빠르게 적응한 일부 시각장애인 사이에서도 모바일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성주와 기사’가 유행하기도 했다. 성주와 기사 역시 모바일 게임이긴 하지만 모든 메시지를 머드게임처럼 텍스트로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20년 전 머드게임이 장르를 바꾸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성주와 기사 이외에도 다양한 오디오 게임들이 출시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전설의 시각장애인 기사가 되어 딸의 안내를 받으며 미치광이 왕에게 납치된 아내를 구하기 위해 여행하는 스토리를 가진 ‘A Blind Legend’도 관심을 끌고 있다.
  여전히 머드게임과 센스게임은 시각장애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게임들은 모두 짧게는 10여 년, 크게는 20여 년 전에 유행하던 것들이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시각장애인들의 게임이 다양화되지 못했을까? J 씨는 ‘접근성’의 문제라고 진단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정안인들이 하는 게임을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많은 정보가 텍스트로만 주어진다면 정안인과도 리니지를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나 문제는 간단치 않다. 명작 오디오 게임 ‘A Blind Legend’에서 유저는 딸의 안내를 음성으로 제공 받는데 방향이나 거리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곧바로 오세요”, “왼쪽에 있어요”, “뒤에 있어요”처럼 말해 줄 뿐 정확한 방향과 거리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리니지 같은 ‘MMORPG(대규모 다중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의 경우 화면에 나타난 모든 개체의 정보를 텍스트로 제공받고 활용하기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시각장애인들이 정보를 확인하는 시간에도 이미 게임은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게임의 장르나 성격에 따라 접근성이 보장되더라도 함께 즐기기 어려운 게임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게임의 접근성 확보는 장애차별 해소의 기본 원칙임에 틀림없다.
  다수의 국내 게임사들이 다양한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통해 장애인들을 위한 행사를 개최하는 등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으로 시각장애인이 즐길 수 있는 게임 콘텐츠를 개발해 주는 것이다. 정안인과 차별 없이 게임할 수 있는 날은 언제나 가능할까. 속히 실현되기를 기대해 본다.

- 점자새소식 2017년 10월 15일자 기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