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박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

tosoony 2011. 11. 28. 00:30

얼마전  어느 학생이 시각장애인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혼자서 지하철을 탔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뭐 그일이 자랑거리냐며 비아냥거리는 댓글을 단 사람도 있었지만  난 그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새삼 깨닳은 터이라 늦게나마 그 학생에게 격려와 박수를 보내고 싶다.

나도 두 눈의 시력을 상실한 지 만 5년이 되었다.

 그 5년동안 중에서도 2년은 내 온몸의 거의 모든 것들이 망가저 겨우 숨만 쉬며 살았고.

당시만 해도 오늘 이처럼  이 곳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점차 몸이 회복되고 여러분들과 교분을 쌓아가면서  내가 가장 부러웠던 것이 잔존 시력이 전혀 없음에도 혼자서 버스타고  지하철은 물론 기차타고 전국 어디든 다니는 분들을 보면서 얼마나 부럽고 한편 어떡하면 나도 저럴 수 있을까 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내가 올 7월  나로서는 일종의 모험일 수 있는 서울에서  혼자서 경기도 화성 집까지 가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내가 타고 올라갔던 차량을 먼저 내려 보냈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복지콜을 타고 사당역까지 온 다음 복지콜 기사님에게  내 집까지 가는 버스에만 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버스 종점까지 온 다음 거기서 택시를 불러 무사하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기분은 뭐라 말로 형용하기 힘들었다.

이때 서울에서 처음으로 동료에게서 지팡이를 얻었고 우리 시각장애인들에게 지팡이야말로 제 2의 눈이라는것도 그때서야 깨달았다.

이것이 나의 첫번째 도전이었고

두번째는 얼마전의 일이다.

이제 혼자서 아파트 단지내 놀이공원에는 오갈 수 있지만

단지 입구의 마트까지는 차가 다니는 길도 건너야 되고 집에서는 약 2백미터쯤 떨어진 거리였다.

난 그날아침 집사람에게 절대로 나를 따라오거나 아무리 늦어도 찾아나서지 말라 당부하고는  식빵과 우유를 사오겠다며 지팡이 들고 집을 나섰다.

뭐랄까 마치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새가 어미가  물어다 주던 먹이를 먹고 살다가 이제는 혼자힘으로 날개짓하여 먹이를 찾아 나서는 그런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대략적으로 방향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겨우 아파트 단지는 벗어났지만 도대체  마트가 어디쯤인지 분간할 수 없었고, 할 수 없이 지나가는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기에 마트가 어디쯤이냐 물었더니 지팡이를 집고 있는 내 모양새를 보고 알았는지 자신이 날 마트까지 안내해 주겠다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불과 10여미터 앞에 마트가 있었고 난 거기서 식빵과 우유를 샀다.

이른 아침이다보니 마트에는 여자 점원 한 분이 계셨고 지팡이를 들고 문을 나서려 하니 계단이 있어 위험하다며 계단 아래까지 나를 인도하고는 더이상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더 이상 도와준다 해도 난 거절할 판이었음으로 고맙다고 말하고는 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몇 발자국 못가서 방향 감각을 상실했고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제법 날씨가 쌀쌀한 아침이었으나 순간 내몸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일요일 아침인지라 지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었고

그대로 서있을 수도 없어 난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다.

 잠시후 사람 발자국 소리가 나기에 저 실례지만 제가 앞을 보지 못하는데요 210동이 어느쪽인가요  그러자  그 여자분은 이렇게 대답했다.

저쪽인데요

아니  눈이 안보여 방향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저쪽이라니 더이상 할말이 없었다.

하긴 그 여자분을 탓할 일도 아니다.

차라리 도와달라 말했다면 그렇게 대답하지는 않았을테니 말이다.

 이미 여자분은 가버렸고 그렇다고 난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없었다.

될대로 되라며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아무쪽으로나 걷기시작했다.

 또 사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남자였고  210동을 가려 한다며 어느쪽인지를 물었다.

난 이날 새삼 느낀 점이 하나 있다.

난 분명 힌지팡이를 들고 있었으며 그간의 말대로라면  최소한 사람들은 힌지팡이가 무었을 의미하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 기대감이 산산조각이 난 날이기도 했다.

주머니속의 전화기를 몇번이고 만지작 거렸으나

내가 아내에게 했던 말도 있고 오기도 생겼다.

세번째 만난 사람에게는 좀 더 솔직하게 말하고

210동 끝자리까지만 날 데려다 달라 부탁하였다.

난 겨우 거기서 방향 감각을 되찾았고

화단을 따라   엘레베이터 입구까지 올 수 있었다.

13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입구에서 집사람이 와락 날 껴않으며 울었다.

이미 내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으며 우린 그날 아침 내가 사온  식빵과 우유로 아침을 먹었다.

나도 눈물이나왔고 집사람도 울었다.

결국은 우린 그날아침 눈물젖은 빵을 먹은 것이다.

짐작은 했었지만 내가 집을 혼자 나서는 순간 집사람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날 줄곶 지켜보았고, 밖에까지 나와 있다가 나보다 한발 앞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 왔으며 입구에서 날 기다렸던 것이다.

 지금도 내가 존경하고 동경해마지않는 혼자서도 버스타고 지하철 타고 다니시는 여러분들

이 날이 있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처오셨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하 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니 외치고 싶다.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감히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말이다.

여러분  건강들 하십시오.


경기 화성에서 이돈규


- 넓은마을에서